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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징쌤 Dec 16. 2020

'서울의 달'의 뒷면

김시덕, <갈등 도시>

나는 종종 장래희망이 인서울이라고 말하곤 했다. 서울에서 자리잡기가 쉽지 않다는, 자조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계속 살고 싶을 만큼 서울이라는 도시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울은 지구 상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많은 인구수를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500년 넘게 수도였던 만큼 문화재들이 많고, 또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는 문화적, 제도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시도하기도 한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면서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답답해하던 나로서는 무엇보다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나는 2006년부터 서울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은 그때 이미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게 바뀌었겠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게 달라진 건 딱히 없는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고, 모르는 만큼 안 보이니까. 그래서 나는 서울이 항상 이 모습이었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해왔다. 이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시덕 선생의 <서울 선언>과 <갈등 도시>를 읽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몰랐을 것이다.  


김시덕 선생은 문헌학자다. 그에 따르면, 문헌학은 '글자가 적혀 있는 판의 물질적인 특성부터 그 글을 쓰고 읽은 사람이 살았던 사회의 특성까지 모두 관심을(본문 p. 64)' 둔다. 김시덕 선생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문헌학자의 눈으로 읽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들이 그에게는 소중한 연구 재료가 된다. 그는 서울에 있는 모든 간판, 표지판, 비석, 전단지 등 글자가 적혀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캐낸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내가 문헌학자의 눈을 빌려 학생들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학생 각자가 필요한 교육을 적절하게 줄 수 있을 텐데.


문헌학자의 눈으로 도시를 보면, 도시가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 훤히 보이는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 터전을 일군다. 그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올린다. 그 와중에 때때로 개발의 손길을 겨우 피한 건물과 사람이 거기에 남는다. 흙이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 지층을 이루듯이, 도시에는 각자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과 건물들이 뒤섞여 거대한 시층을 이룬다. 김시덕 선생은 이 시층에서 '삼문화광장'을 찾는 걸 즐기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삼문화광장'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아스테카 시대, 스페인 식민지 시대, 멕시코 시대의 건물이 한눈에 보이는 광장이라고 한다. 그는 이처럼 서로 다른 세 개의 시대의 건물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에 삼문화 광장이라고 이름 붙인다. 나도 김시덕 선생의 책을 읽고 나서, 서울을 걸으며 곳곳에서 삼문화 광장을 찾곤 하는데, 그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김시덕 선생은 문헌학자로서 서울을 답사하면서 두 권의 책을 썼다. 그 첫 번째 책이 <서울 선언>이다. <서울 선언>은 한양이 경성-서울-대서울로 확장된 과정을 정리했다. 이 책에는 김시덕 선생 본인이 대서울 이곳저곳을 이사해 다니면서 쌓은 기억을 자전적 에세이처럼 적어두었다. 그래서 서울 이곳저곳의 이야기를 꽤나 실감 나게 읽을 수 있다. 그의 서울 답사기 두 번째 책은 <갈등 도시>이다. 도시가 확장되면 새롭게 개발되는 곳이 생긴다. 그곳에 원래 살던 사람들과 개발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 또는 새롭게 이사 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원래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간과 기억을 지키려고 하지만, 새롭게 이사 오는 사람들은 공간을 자신들 입맛대로 바꾸려고 한다. <갈등 도시>에는 이처럼 서울 곳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문화적 갈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김시덕 선생은 도시 개발을 무작정 반대하지 않는다. 강남의 개발 고도 제한이 보다 풀려서 메갈로폴리스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의견이 나는 특히 인상 깊었다. 도시는 개발되고 확장될 수밖에 없다. 갈수록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러 가지 기능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개발되기 이전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기억이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잊히는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도시를 기억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누군가가 보기 좋은 기억'만 획일적으로 남아 다양성이 훼손될뿐더러, 서울이라는 도시를 만들고 가꾸는 건 수많은 보통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있는데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캐내고 기록하는 저자의 노력이 그래서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나와 함께 살고 계신 분도 다행히 나와 취향이 비슷해서, 한 번 길을 나서면 서너 시간 정도는 우습게 걸어 다닌다. 아쉽게도, 여태까지는 '요즘 뜨는 동네'나 '관공서에 의해 잘 가꿔진 곳', '유명한 맛집' 위주로 찾아다녔다. 하지만 김시덕 선생의 책 두 권을 다 읽고 나니, 그동안 나는 이 도시의 매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취미생활의 퀄리티를 좀 더 높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저자는 <갈등 도시> 다음으로 '길'을 통해 대서울의 현재와 미래를 읽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그 또한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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