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한계는 무엇일까
잠시 이곳에 멈춰 서보자.
숨 같은 숨을 쉬어 보자.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대신 되물어 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뭘까? 중요한 게 뭔지 묻는 것부터가 오만한 것 아닐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두 가지 일에 우선순위를 매기려는 것처럼. 비약인가.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어떻게 하면 진득하게 땅에 발 붙이고 할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까. 왜 이런 고민을 할까? 우스운 고민이다. 그냥 하면 되는 건데. 그게 안 된다. 어른이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언제나 어린애처럼 웃었던 아빠의 얼굴이 내게도 있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의 기분은 형용하기 어렵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 그렇지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고 느낀다. 뭐가 더 필요한가? 그런 삶은 행복할 거라는 약속? '더 많은 걸 느끼게 되어 삶이 풍요로워질 거야.' '좋은 일이야.' 기뻐해야 하나? 그러나 이 시대에 인간들의 속을 들여다보는 건 매일같이 질병에 걸린 몸뚱어리를 열어보는 의사와 다를 바가 없고.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나의 부분을 끌어안고 무더위 속을 걷는다.
개척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렇게 살아가려는 움직임에 더 가깝다. 무언가를 넘어서거나 초월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흘러가고 싶은 것이다. 진실, 그게 진실을 추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즉시 두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놓쳐 버렸을 뿐이다. 아무도 눈에 보이는 걸 내가 그렇게 믿는 거라고 하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거라고 해서 믿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힘을 막 들일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또는 하지 않기 위해. 넘어서기 위해,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의지? 의지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아예 허상의 것은 아닐까? 나는 나에게서 의지란 것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것이 정말 당신 의지나 의사로부터 발휘된 것이 맞나?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해내온 것들이 실은 내가 해내고 싶었거나 해내려고 했던 것들도 아니었고 그저 행해진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라는 수사가 무색하게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순환으로 하여금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임. 인류. 우리가 감히 어쩔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설령 우리 자신일지라도, 동시에 대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껴지는 걸 언어화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반드시 오류를 동반하기에 더 그렇다. 감각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그걸 번역하는 순간부터 오역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면서도 이 말이 틀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틀린 것을 발견해 고칠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걸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삶은 자연의 흐름을 우리 식대로 번역해 보는 일에 가깝고, 수학은 지금까지 밝혀진 언어 중 가장 정확하며 그래서 아름다운 동시에 대다수 사람들에게 어려운 것일 테고, 또한 번역이라는 행위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자연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방법은 언어화가 아닐 것이라는 결론도 도출해 볼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의 삶에 대해 통째로 불확실성을 없애버려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아가려고 이런 말들을 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뱉는 모든 말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때로는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해석하기에는 조금 꼬였을지언정)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단적으로 솔직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위의 글이 모두 오류였다고 밝혀지더라도, 어쨌든 내가 지금 느끼는 감각에 기반하면 인류를 비롯한 모든 자연의 존재는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흐름 속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정리를 통해 나는 한결 편안함과 기묘한 자유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한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그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했던 걸까? 이제 와 실컷 써놓고 다 까먹어버렸다. 번역가가 훌륭한 소설을 직접 써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자연의 감각을 번역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본질의 휘발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흐름에 나를 맡겨보자. 내가 어디에 들리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순간을 선택하여 누릴지 살펴보자. 내면의 작은 자아는 그걸 보고 겨우 '너에게 이런 면이 있구나' 이렇게, 조금은 널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이, 그러나 하나도 모르는 채로... 반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찰나들로 삶을 이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국 알지 못한다. 그 사실만이 우리 뇌의 중심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수학 공식을 외우는 학생들처럼 대처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을 우리 대부분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