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말이 더 이상 솔깃하지 않은 이유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러닝을 시작한 지 3년 차.
지난겨울 동안의 기나긴 러닝 슬럼프ㅡ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를 '러너스 블루'라고 칭했다ㅡ를 딛고 4월부터는 좀 더 집중해서 달리고 있다. 물건의 수만 줄인다고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도 마음도 몸도 비워나가야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는 아니었다. 물건의 수를 줄이며 시작한 미니멀라이프였는데 이제는 정신도 조금씩 비워나가고 있다.
욕망은 비우고 나 자신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된다.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것들 중 '운동'과 '독서'는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든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 행위라고 생각한다.
"운동하지 않고 살을 뺐어요."라는 말이 더 이상 솔깃하지 않은 이유는 운동이라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면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성취감'과 점점 강해지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소소한 성취감들로 채워진 하루는 나 자신을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쉽게 성취감을 느끼기 힘든 현대인들에게 '운동'만큼 성취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없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것.
계절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러닝.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의 호흡을 실어 보내며 자연의 향기를 마음껏 마신다. 러닝을 하고 있을 때만큼은 오롯이 나 혼자다. 음악에 맞춰 팔다리를 움직이며 무념무상에 잠길 수 있다. 나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정신은 고요해진다. 내 정신은 광활한 우주에서 조용히 유영하듯 사색에 잠길 수 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이제 오전의 러닝은 뜨겁다. 뛰면서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낀다. 이제 더 이상 아침에 뛸 수는 없겠다고 생각되어 오랜만에 저녁에 달렸다. 러닝이 이토록 시원했다니! 뜨거운 햇살을 피하려고 썼던 모자도, 마스크도, 팔토시도 다 벗고 좀 더 가벼운 몸으로 달릴 수 있다. 오전러닝의 매력에 빠졌을 때는 저녁러닝을 해야만 하는 시기가 다가오는 게 왠지 아쉬웠었는데 막상 저녁러닝을 하게 되니 또 그 나름의 매력에 빠진다. 인생은 다 그렇다. 막상 시도해 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그 나름의 매력을 찾는다면 말이다.
해 질 녘의 도시의 풍경은 참 아름답다. 별처럼 잔뜩 수놓은 도시의 불빛들이 강물에 어른거리는 풍경에 취해서 좀 더 빠르게 달린다. 태양을 피했다고 이토록 빨라지다니. 아주 빠르게 달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시원한 바람이 나를 좀 더 가볍게 만들어준다. 내 몸이 저절로 빠르게 달려진다. 바람처럼 달린다. 오전러닝보다 기록이 더 좋다. 살아있다. 숨 쉰다. 달린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고, 소소한 돈벌이를 하고. 그렇게 보내는 하루 속에 나 자신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피곤하면 피곤한대로 '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쉽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단 나서서 서서히 달리다 보면 가벼워진다. 몸도 생각도. 러닝으로 생각의 공백을 획득한다. 그리고 독서로 생각의 공백을 채운다. 이렇게 러닝과 독서로 나를 비우고 채운다.
일상의 무게를 덜고 싶을 땐, 정리를 하고 달린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을 알고 좋은 걸 하는 게 좋은 나. 인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좋은 것을 좋아하면 된다. 좋아하지 않더라도 좋은 것을 하게 되면 분명 좋아진다.
내게 러닝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