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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구지니 Sep 25. 2024

다이브

수업 외 다이빙 금지



관리 소홀로 코팅이 벗겨졌다. 새로 사던지 김 서림 방지제를 사야 하는데 그래도 물속으로 들어오면 조금 전까지 발밑에 있던 타일이 선명하게 보이고 떠다니는 머리카락과 각질도 잘 보인다. 이 정도면 그냥 써도 되겠다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 중간에 한 번씩 수경을 헹궈주면 또 괜찮아졌다. 물속은 간지러울 만큼 고요하다. 수영장 특성상 소리 지르는 강사님 목소리도 물속에선 적당히 잘 들리고 자세를 잡아주는 목소리가 자장가 같기도 하다. 그대로 그냥 눈을 감아도 될 것 같다. 잘 할 생각 없이 그냥 하느라 여전히 수영장 물을 마셔도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 시간이 끝나도 다음 수업 직전까지 수영을 더 하다 가는데 연습의 목적이나 붐비는 샤워실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음이 없다면 계속 있고 싶을 만큼 물속에 있는 게 좋을 뿐이다.




한산해진 샤워실에서 여유롭지만 꼼꼼하게 씻는다. 바지와 속옷은 내리지 않아도 되는 화장실을 쓰고 마저 씻는다. 샤워실에서 나오면 내 방처럼 탈의실을 돌아다닌다. 수영을 하면서 바디 오일을 쓰기 시작했다. 페퍼민트 & 유칼립투스 기대 이상이다. 이걸 바르면 몸에서 눈 부신 빛이 나는 느낌이다. 바디 오일을 다 발라도 옷은 마지막에 입는다. 빛나는 맨몸으로 좀 더 돌아다니고 싶다. 역시나 기다리지 않고 쓰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모든 우울도 같이 말려지는 기분이다. 천천히 옷을 입고 건물을 나온다.




내리막길을 계속 내려가면 집이 나온다. 점심을 먹고 나른한 몸으로 책을 읽는다. 영화 보고 선풍기를 씻고 화장실 청소도 한다. 정해져 있던 일들은 아니다. 그냥 생각나면 바로 하는 일들이다. 그러다 나른한 마법이 풀리면 운동을 한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원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는 내 자취방에서 수영과는 달리 에너지가 터질 거 같은 몸을 느끼며 운동하고 저녁을 먹는다. 마지막 약을 먹고 비어있는 약통을 채우고 일기를 쓴다. 녹슬지 않기 위한 습관이다. 오늘 쓰일 일기의 내용은 아침에 깨자마자 적은 꿈 내용과 수영장에서 눈을 맞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책과 영화를 보며 들던 생각들을 빠짐없이 적는다. 하루를 적는 일기에도 두 시간 정도가 걸린다. 손은 저리고 먹은 저녁이 거의 소화가 된다. 스트레칭으로 우울 머금은 마지막 수분을 몸 밖으로 꺼내고 샤워한다.



이런 매일의 끝이 내게 무엇을 경험하게 할지 두려움과 막연함이 또 스며들기 전 잠에 들기 위해 물속에 있는 나를 떠올린다. 먹먹한 물소리에 집중한다. 물결을 느낀다. 볼을 씹으며 발작하듯 일어나 빠르게 뛰는 심장 대신 누군가 공주를 깨운 듯 포근하게 눈을 뜬다. 심장은 아직 잠을 자듯 아이처럼 새근새근 뛴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생생하던 꿈 내용이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기 전 다시 눈을 감는다. 순서를 정리하고 자막을 만든다. 그대로 핸드폰에 기록하는데 날짜 기재는 필수다. 시간과 숫자의 신비함을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 생일날 내가 죽는 꿈을 꾼다든지 그런 재미는 나를 좀 더 살게 한다. 꿈을 퇴고하듯 급하게 써서 맞지 않는 맞춤법과 문맥을 확인하고 천천히 일어나 물을 마신다.



불은 언제쯤 끄고 잘 수 있을까. 불을 끄면 누군가 켜주기 전까지 눈을 못 뜰 거 같다. 카페인을 끊고 자기 전 핸드폰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잠들지 못해 울던 날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니까 불 끄고 자는 건 천천히 하자. 아침부터 패배감으로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다. 일찍 잤다는 사실에 집중하자. 스스로 되뇐다. 눈뜨자마자 아침 먹을 수 있는 속이 못 된다. 먹는 약도 식전이라 일찍 일어났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 아침을 먹는다. 집 밖을 나갈 생각만 하면 이상하게 집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진다. 손톱과 발톱을 깎고 눈썹을 정리한다. 설거지하고 분리수거와 빨래도 한다. 바짝 깎아 아린 손끝으로 물건 만지는 걸 좋아한다. 제대로 준비된 채로 뭔가를 하는 느낌이라 안정감이 든다.




다른 시간대는 금방 마감되어서 가장 애매한 시간에 수강 등록을 하게 됐었다. 덕분에 평일 일자리를 구하는데 제약이 많아 아직도 주말에만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내 하루가 안전하다고 느낀다.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돈은 부족하지만 차오르는 풍족함을 알 수 있었다. 믿었던 기준으로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한 거 같다며 회의감이 들 무렵 수영 갈 시간이다. 그동안의 습관으로 날 기쁘게 해줄 수영을 바로 앞에 두고도 (수영장은 실제 물리적인 거리도 자취방의 코앞이다) 회의감에 빠져 매일을 우울로 채웠다. 오늘도 수영을 갈지 말지 열띤 토론이 오간다. 할지 말지에 대한 각 근거는 늘 타당하다. 하지만 시간은 말지의 편이다. 하지 않는 것에 편파적인 시간으로 늘 무력하게 있어야 했다. 그런 날은 집에서 시간 맞춰 밥을 먹지도 화장실을 청소하지도 일기를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수영하는 것에는 어떠한 근거도 필요 없다. 유희의 목적은 유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나간다. 반쯤 왔을 때 회원 카드를 챙기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가방을 챙기며 잠시 식탁에 올려둔 카드가 떠올랐다. 그게 어제거나 지나간 다른 날의 기억이길 바랐는데 가방에 없는 걸 보니 오늘인 게 확실하다. 토론으로 시간이 지체되어 다시 집에 들렀다 수영을 가기엔 수업의 반도 듣지 못할 것이다. 수영장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라 가깝지만 땀이 많이 흘렀다. 집에서 씻고 잠이나 자겠다며 기대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어떤 선택도 다신 하지 않겠다고 수영 생각에 잠시나마 들뜬 나 자신을 비웃으며 집으로 내려간다.



좋지 않은 건강에 그 정도 거리에도 비 맞은 듯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집에서 씻으면 배수구의 머리카락을 내가 버려야 한다. 그리고 너무 더워서 물속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욕조는커녕 대야도 없어 족욕조차 상상할 수 없는 화장실 문을 본다. 수영가방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아닌 식탁 끝으로 시선을 돌리는 동시에 카드를 챙겨서 다시 나온다. 얼마나 지났을까 확인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서두른다. 윗옷은 땀에 많이 젖어 잠시라도 마를 수 있게 옷걸이에 걸어준다. 나머진 던져 넣고 샤워실로 간다. 많이 늦은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샤워를 할 수 있다. 들어갈 때 샤워는 늘 올인원 비누를 쓰는데 이건 사실 그냥 내 감성이다. 샤워실 안의 시계를 확인한다. 포기하기엔 아까운 시간이었다. 다시 올라올 때 뛰어오느라 죽을 뻔했는데 그 간절함이 고작 취미인 수영인 게 좋았다.



수영장을 들어가기 전 작지만 예뻐서 골랐던 수영복의 매무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커튼을 젖히며 나간다. 친목 없이도 반가운 우리 반 수강생분들을 보며 인사를 한다. 찰박찰박 물이 발에 밟힌다. 다이빙으로 물속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직 할 줄도 모르고 수업 외의 다이빙은 금지다. 그리고 지금 레일 깊이에서 다이빙은 몸 어딘가가 부서질 것이다. 그렇게 한 발짝씩 걸어 내려간다. 숨을 다 고르지 못한 분들이 젊은 사람 먼저 하라고 자리를 비켜주신다. 그럼 나도 웃으면서 원래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수영을 한다. 강사님도 원래 있던 사람 가르치듯 자세를 잡아주신다. 오늘도 난 물속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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