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포자가 만난 양자역학
고 1 때 '과포자'의 길을 걸으며 문과를 선택했던 나는 오랫동안 과학을 의식적으로 멀리해 왔다.
30년 넘게 거부해 온 과학의 벽을 처음으로 허물어준 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였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도 많았지만
세상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는 즐거움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우주의 비밀이 과학을 통해서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데
세상을 경제학, 심리학, 인문학 같은 문과의 렌즈로만 바라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모스' 다음으로 선택한 책은 '김상욱의 양자 공부'다.
양자라니!
뉴턴의 고전역학조차 잘 모르는 내가 양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쉽게 설명했다'는 말을 믿고 책을 펼쳤다.
결론부터 말하면 '책의 배신'이다. 아무리 친절해도 양자는 역시 어렵다.
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 세계는 우리가 사는 거시 세계와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너무 달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머리를 줘어뜯으며 읽다보니, 기묘한 양자 세계가 거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의외로 깊은 통찰을 건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인류가 멸망하여 단 하나의 문장만 남길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을 남겨야한다고 했다.
그 원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우리의 몸은 거시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를 구성하는 수조개의 원자와 전자는 미시 세계, 즉 양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 속해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 몸과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이 '전자'라는 녀석이 참 특이하다.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이다. 전자를 하나씩 쏘아 보내도, 전자가 어디 슬릿을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중첩 상태로 움직이며, 그 결과 두 슬릿을 모두 지난 듯한 파동의 흔적(간섭 무늬)를 남겼다.
A이면서 동시에 B인 상태, 이것이 바로 '양자 중첩'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우리가 '측정(관측)'하는 순간 전자는 하나의 슬릿을 통과하는 입자의 상태가 된다.
여기서 측정이란 반드시 사람의 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측정 대상인 전자를 제외한 주변 환경이 전자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자신을 측정하면 야구공 같은 입자처럼 행동하고, 측정하지 않으면 2개의 슬릿을 동시에 지나간다고?
이와 같이 전자가 동시에 2개, 아니 수십개의 구멍을 동시에 자나갈 수 있는 상태를 중첩상태라고 한다.
책 후반부에는 측정 장비 없이 '어느 구멍을 지나갔는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주어질 때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실험이 나온다.
결론은 충격적이다. 물리적인 직접 관측이 없어도 어느 구멍을 지났는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존재하는 순간 전자는 입자처럼 행동했다. 이 때문에 현대 물리학자들 중에는 "우주는 물질이 아니라 정보의 네트워크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질 중심의 세상에 익숙한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개념이다.
그러다면 수조개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는 왜 문 두개를 동시에 통과할 수 없을까?
그것은 우리 주변에 우리를 끊임없이 관측하고 상호작용하는 것들이(공기, 빛, 열 등등) 너무 많아 '결어긋남'이라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측 덕분에 우리는 파동성을 잃고 하나의 단단한 실체로 묶여 있는 셈이다.
전자의 특이점은 또 있다. 바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 두 가지를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한 불확정성 원리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다.
원리는 이렇다.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 짧은 파장의 빛을 쏜다. 짧은 파장의 빛은 에너지가 너무 강해 마치 전자를 농구공으로 때린 것처럼 저 멀리 튕겨버려 운동량을 놓치게 된다.
반대로 운동량을 알기 위해 긴 파장의 빛을 쏘면, 이번엔 눈금이 너무 큰 자를 쓰는 격이라 위치를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다.
단순히 측정 기술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전자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부터 위치와 운동량이 확정되지 않는 뿌연 녀석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통제형 인간인 'J'로서 이 원리를 접하자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늘 모든것이 딱 정해져 있기를 바랐고, 통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면 불안감과 집착에 쉽게 휩싸였다. 직업을 선택할 때 '안정성'이라는 요소를 고려한 것도, 결혼 준비를 하며 모든 변수를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맨 것도 결국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 계획을 전날에야 세우게 된 것도, 역설적으로 '전날에 세워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는 말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조차 불확실한데,
그 집합체인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완벽하게 관리하겠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한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확실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우주의 본질인 '불확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다가올 3월이 걱정이다.
작년엔 운 좋게 좋은 학생들과 학부모님을 만났지만, 올해는 어떨지 벌써 불안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지금의 3월은 '행복한 교실(A)'와 '힘든 교실(B)'가 아직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올해의 교실은 내가 교실문을 열고 아이들을 만나 실제 정보가 생성되는 순간 결정될 문제다.
그러니 지금은 그 불확실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미리 걱정하며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이 뿌연 상태를 즐겨야겠다.
물론 깨달음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였다.
책을 완독한 당일, 결혼식에 가기 위해 50분 전에 집을 나섰다. 고작 3.8키로 거리이니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보통 5분 간격대로 오는 버스는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택시는 블루 파트너스를 불러도 한참 후에 온다고 한다.
계획이 무너지자 통제력을 잃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나는 결국 남편에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3.8키로 가는데 50분이 걸리는 게 말이돼? 내가 뛰어가는 게 더 빠르겠다! 남편이 데려다줬으면 좋았을텐데!"
우역곡절 끝에 결혼식엔 정시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반성이 밀려왔다.
'아, 계획대로 안 되는 건 당연한일인데, 세상은 원래 불확실한 것인데 내가 또 통제하려고 발버둥 쳤구나.'
남편에게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다. 역시 사람은 머리로 깨달아도 마음으로 체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나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인생이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우주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