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교회에 다녔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를 한 적이 없었다. 내 친구 OO 네 집은 교회에 안 다녔지만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었다. 부러웠다. 부러웠지만 우리 집에도 부모님의 여유 속에도 트리를 놓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에만 담아 두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크리스마스 무렵에 세탁소를 하시던 어머니의 부탁으로 세탁물 배달을 하러 한 집에 갔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였던 그 집은 따뜻했고, 한 젊은 부부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문 틈으로 보인 찰나였지만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다 따뜻했다.
가을이 이제 끝났구나 싶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크리스마스에 대한 알 수 없는 낭만적인 기대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오리털 파카도 메이커 스키 장갑도 없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무언가 기쁘고 행복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볼에 추운 바람이 스치고 코로 매연의 탄내가 들어와도 거리에서 캐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황홀한 기분에 매료되었다. 어쩌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라도 내리기 시작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복권에 당첨된 것 마냥 좋아했다. 이렇게 시작된 환상적인 낭만은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잠깐 더 살랑거리다 새해 첫날 아침이 되면 현실로 돌아온다. 언제까지 이것을 누렸는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의 낭만은 어른이 되면 원래 없어지는 것인가 보다.
잊고 살았던 이 살랑거림을 이제 우리 딸들이 누리고 있다. 며칠 전부터 말하지도 않았는데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 얘기를 하더니 한 달도 더 남았는데 성화를 부려 트리를 꺼내 놓았다. 트리는 내가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추억이라 나도 싫지 않았다. 딸 둘이서 이렇게 저렇게 꾸미더니 제법 멋진 트리가 완성되었다. 매일 저녁 트리 점등은 내가 한다. 반짝반짝 불이 켜진 트리를 보면 어릴 적 낭만을 이룬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 티를 내지는 않는다. 이 따뜻함이 딸들의 기억 속에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 첫눈이 왔다. 어제부터 오늘 눈이 온다고 딸 둘이 난리를 피더니 새벽부터 일어나 눈이 엄청 왔다며 안방 침대로 기어 올라왔다. 첫눈이어서 기대를 안 했는데 생각보다 눈이 많이 와있었다. 질퍽 거리는 눈길을 헤쳐 출근을 하고 어떻게 퇴근을 하나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들은 벌써 신이 나서 놀러 나갔다고 한다.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은 생각하니 나도 신이 났다. 퇴근길 걱정이 하나도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