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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ggy Poo Jul 12. 2023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할머니를 모시고 소싯적 사시던 고향 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나지막한 산이 뒤에 있어 산뱅이 마을 혹은 삼봉이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는 해방이 될 때 아홉 살이었는데 얼마나 기쁨이 컸는지 온 마을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3일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에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학생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지금은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시절에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울었다니 아직도 생각만 하면 마음이 서글프다.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봄이 되면 나물을 캐러 다니고 가을에는 추수하는 일손을 도왔을 것이다. 할머니는 열아홉 살까지 그 마을에서 사시다가 트럭을 타고 경기도 평택 범침리로 시집을 오셨다.

  할머니는 마흔다섯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셨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하다가 논두렁에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뇌출혈로 돌아가신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작은 아버지댁과 같이 사시다가 집안 사정으로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해에 우리 집으로 오시게 되었다.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 방 두 개짜리 오래된 16평 아파트에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우리 집에 할머니가 오시는 것이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셨을지 생각이 든다. 이십 년을 넘게 살던 편하고 익숙한 시골집을 떠나 좁디좁은 우리 집으로 오셨으니 당신의 인생이 비참하게 느껴지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셨다. 환갑이 넘은 나이였지만 우리 집에 오셔서도 새벽마다 미나리깡에 나가서 용돈을 벌어오시고 아파트 옆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상추며 쑥갓을 키우셨다. 그렇지만 어리고 못되었던 나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같이 사시는 것이 싫어서 자주 툴툴거리고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내가 할머니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1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 책상 위에 홍시가 하나 놓여 있었다. 몹시 홍시를 좋아했던 나는 기분이 좋아 얼른 먹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놓아두신 줄 알고 여쭤보았더니 할머니가 놓아두셨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것이 싫어서 마음에 불편한 것이 었었는데 할머니는 내가 홍시를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시고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를 그릇에 담아 내 책상 위에 올려두셨던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할머니의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할머니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은 나를 승복하게 만들었다. 또 할머니는 종종 자장면과 볶음밥을 시켜주셨는데 아마도 할머니는 나에게 자장면을 가장 많이 사주신 분이실 것이다. 내가 중국집 볶음밥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할머니 때문이다. 귀가 어두워 큰 소리로 텔레비전을 켜두고 끓인 밥에 새우젓이 제일 맛있다며 후후 불어드시던 할머니는 내게 가장 소중한 분이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나는 마음이 힘들어 찬송가를 틀어놓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돌아가실 수도 있는 고비를 한두 번 넘기고 두 달여간 투병하시던 할머니는 어느 날 새벽 조용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사실 몇 년 전 시골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시던 친구를 먼저 하늘로 보내시고 마음의 준비는 이미 하고 계신 것 같았다. 항상 나를 보면 씨익 웃으셨는데 투병하시는 동안에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웃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나는 할머니가 생의 의지를 많이 내려놓으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가 문병을 온 내 사촌동생에게 '하나님이 할머니 빨리 데려가시도록 기도 좀 해라.'라고 하시는데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에 선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재물도, 명예도,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화나는 일도, 서운한 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나는 아주 화나는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발 물러나 지금 나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를 잠시 간병할 때 여쭤본 것이 있다.

  "할머니, 나한테 왜 그렇게 자장면 많이 사줬어?"

  "잘 먹으니까 사줬지."

  세상에 자장면을 많이 사주신 할머니의 사랑보다 귀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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