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분들이 웃으며 건네주시는 말들이 있다. 나를 위한 칭찬이 분명하다. 감사하다곤 말했지만 진심으로 웃지 못한다. 말의 표면이 아니라 그 밑을 헤집게 된다. “뭐, 그렇게까지 해석을 해”라며 과하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을 거다. 그렇지만 그 칭찬들로 담임교사를 떠보는 분들이 계시기에 마냥 기쁘지는 않다.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받았더니 의외로 묵직할 때의 느낌이라면 비유가 될까. 무게는 다르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선물들. 받고 싶지 않은 선물들에 대해 소개해보고 싶다.
첫째, “너무 어려보이세요.” 내가 경력을 더 이상 세기 힘든 넉넉한 나이를 가졌다면 너무 감사한 칭찬이다. 하지만 보통 저경력 선생님들이 듣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혹시 처음이세요?”라는 말이 뒤따르기도 한다. 저경력 선생님이 더 열정있어 좋다고 하시기도 하지만 어떤 전문가가 “네, 제가 경력이 적어요.”라고 흔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특히 대부분의 신규 선생님들은 자신이 갓 발령받았다는 걸 숨기고 싶어한다. 그러니 우리 선생님이 동안이 아니라 진짜 어리신 것 같으면 나이 관련 얘기는 꺼내지 말자. 물론, 나이가 많아도 나이 얘기는 싫다. 그래서 나도 학부모분들께 나이는 절대 물어보지 않는다! 동료 선생님들끼리도 짐작만 하고 잘 묻지 않는다.
간혹 어린 선생님들께 나이,결혼여부,아이가 있는지를 물으시는 분들이 계신다. 아이를 키워보신 선생님들이 학부모분들과 공감을 더 나눌 수는 있다. 하지만 교사는 교육전문가이지 육아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돌봄과 교육은 엄연히 다른 분야다. 자신의 아이를 부모처럼 봐주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교사는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된다. 부모와 교사의 역할은 다르기에 교육기관이 있는 거다. 우리반 애들 가르치는 건 괜찮은데 막상 자기 애는 도저히 어떻게 안 된다는 선생님들도 많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 거다. 학부모와 교사가 하는 일이 어린 아이가 대상인 건 같지만 ’무엇을‘이 다른 각자의 분야가 있다. 동안이라는 칭찬으로 담임교사의 전문성을 넘겨짚지 말자.
둘째, 작년.옆반 선생님과 비교하는 말. 비교는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그 선생님보다 좋든 나쁘든 담임교사는 지금 자기는 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평가의 결과를 들은 거다. 다른 선생님 얘기는 그냥 안 꺼내는 게 좋다. 엄친아,엄친딸이라는 단어가 금지어인 이유가 있는 거다. 어떤 교사가 “민준이네 어머님은 이런 것도 다 신경써주시던데요.”,“율이네 아버님보다 친절하셔서 좋아요.”이라는 말을 뱉던가. 세상에, 방금 내가 전국 부모님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주문을 배운 것 같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경우 학부모보다 동료 선생님끼리 더 친하다. 시어머니가 형님과 동서를 줄세우며 전 부치기를 시키는데 그 둘은 카페에서 그 대사를 디저트 삼아 커피를 마시는 거다. 물론, 당신은 시어머니가 아니다. 학교에는 며느리도 없다. 우리는 동태가 부서지지 않으면서 속까지 익도록 땀흘리게 노력하여 마침내 아이 한 판을 완성해내는 동지가 아니던가! 옆집 차례상보다 때깔이 좀 안 좋은 게 대수겠는가. 먹고 탈 나는 게 걱정되면 슬쩍 다시 판에 올려 좀 더 지져주면 된다. 그러다 탄 부분은 모른 척 뒤집어 가려주고 맛있게 먹어줘야 다같이 모인 보람이 있는 거다. 그래야 어른들 모인 틈에서 아이도 눈치보지 않고 웃을 수 있다.
셋째, “너무 착하세요.” 아니, 착하다는 게 얼마나 좋은 말인데! 나도 착하다는 말이 좋게만 쓰이는 세상을 바란다. 하지만 부모들이 우리 아이가 언제나 착하기만 바라지 않듯이 교사도 마냥 착할 수만은 없다. 한 교실에 모인 학생들에게 좋은 일만 생길 수 없기에 교사도 부드럽게만 지낼 수 없다. 보통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해야한다면 악역이어야 할 때가 더 많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기 약점을 기어이 들춰 훈련시키고서는 이기니까 “잘했어” 한마디 하는 악덕 코치 정도겠지.
“선생님은 너무 착해요!”라고 아이들이 말하면 교사는 ’이거 안 되겠는데?‘라며 반의 질서를 다시 잡을 궁리를 시작한다. 내가 나쁜 선생님이 꿈이라는 게 아니다. 권위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 학생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 ’우리 선생님은 착해서 다 괜찮아‘같은 분위기가 자리잡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내가 착하다는 비밀이 학부모에게까지 알려졌다? 내가 너무 애들을 풀어줬나? 내일부터 간식 봉인하고 영혼없이 입만 웃으며 경고해주지! 그 친절한 선생님께서 속으로 이런 다짐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 선생님의 온화함을 빛내주고 싶으시면 “아이가 선생님 웃으실 때 너무 예쁘다고 하더라고요.”나 “혼낼 때는 무서운데 너무 좋대요.”라고 하는 걸 추천한다. 사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야, 선생님이 웃으셨어!”라며 나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야 너네가 날 늘 긴장하게 만들잖아. 아이들이 가만히 앉아있는 법을 배운다면 아니, 앉아서 싸우는 기술만 배워도 모든 선생님들은 착해질 수 있을 거다.
나도 학부모의 한 마디에 온갖 해석의 안테나를 세우는 이 상황이 싫다. 이 칭찬들을 아이들이 했으면 피식 웃으며 “고마워.”로 넘길 수 있었을 거다. 옛날보다 학부모와 교사 사이는 분명 가까워졌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 손을 휘두르면 맞을까봐 다가오는 걸음에 움찔한다. 우리의 손은 아이를 위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함임을, 누가 먼저 손을 놓을까 초조할 필요가 없다는 걸 진심으로 믿고 싶다. 서로를 감시하지 말고 아이를 바라보자.
+작은 이야기 한 토막+
그해, 나는 6학년이었다. 오해 없이 말하자면 6학년 담임교사였다는 거다. 앞날이 창창한 사춘기 아이들의 기를 누르느라 없던 아우라까지 끌어와 잔뜩 팽창 중이었다. 그런 나를 힘 풀리게 만드는 대화가 나왔다. 아이들은 한참 미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근데 나는 교사해도 우리반 담임은 못할 것 같아.”
“맞아. 우리 반은 좀 빡세지.”
“그치.”
잠깐. 너네 다 알면서 그러는 거였어? 내가 왜 힘든데. 특히, “그치”라고 한 너. 너 때문이잖아. 다행히 아이들은 건강하게 졸업했다. 나는 방학 후 기다렸다는 듯이 앓아누웠지만 말이다. 선생님들끼리 골골 거릴 때 해주는 말이 있다. “이제 방학할 때가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