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마음 속 두려움
MBTI에서 S냐 N이냐에 따라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S는 현실적이기에 ‘만약에’ 라는 상상을 잘 안 하지만 N은 머리 속에서 영화를 매일 찍고 있다. 나의 ‘N’은 불안과 짝꿍이 되어 블록버스터급 재난 영화를 찍는다. 수업 중 무심코 던진 농담이 녹음기에 담겨 뉴스에서 재생되진 않을까, 귀여워 준 간식이 알레르기 소동을 벌이면 어떡하나. 누군가는 기우라고 웃겠지만, 드라마보다 더 기가막힌 일들이 뉴스를 도배하는 세상에서 이런 상상력은 생존 본능에 가깝다.
요즘에는 S인 교사들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한다. 그런데 정말 말이 안 될까? 말이 안 되길 바라지만,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벌어지는 세상 앞에서 교사가 품고 다니는 두려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털어놓으면서 내 기우일 뿐,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되뇌고 싶다. 학부모 분들도 교사도 불안을 가진다는 걸 알고 서로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첫째, 학생의 안전 문제.
모든 사고가 안타깝지만 어린 학생들이 관련된 사고는 더욱 가슴 아프기 마련이다. 그걸 알기에 교사들도 학생들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인다. 격한 체육 활동 뒤 몸살이 나거나 친구와 싸우다 다치고 급식 먹다 체하는 등의 문제도 우려되지만 그 뒤에는 더 큰 걱정이 있다. 체험학습 중 벌어지는 교통사고, 간식 섭취 중 호흡 곤란, 복도에서 넘어지며 뇌가 다치는 경우, 급식이나 물 받는 중 입는 화상 등 정말 적은 비율이지만 일어나면 모두가 아파하는 일들이 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런 일들이 교사의 책임일까? 내가 교사라 그런지 누구의 탓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재난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사고를 당한 아이를 생각하면 탓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런데 학생 안전사고에서 명확한 책임소재나 누구의 악의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요새 수학여행,수련회뿐 아니라 체험학습도 안 가고 체육대회,학예회도 축소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한다. 안전문제가 벌어졌을 때의 민원 소지를 아예 없애는 것이다.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로 행사들을 추진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안 하면 없어질 사고일지, 그렇게 한다면 아이는 평생 안전할 수 있는건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우리가 위험하다고 집에서만 살 수 없고, 설사 그렇다 해도 집에서도 벌어지는 게 안전 사고다. 우리 모두는 늘 안전할 수 없다.
둘째, 아동학대 고소.
모든 교사가 한 번쯤 스치듯이라도 상상해봤을 거다. 내가 아동학대로 고소당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멈추게 된다. 욕하는 아이에게 소리지르는 것도, 물건을 던지는 아이의 손목을 잡는 것도, 학습을 거부하는 아이에게 벌 세우는 것도 말이다. 그 모든 게 정서적학대, 언어 학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에게는 그 모든 걸 하지 말고 훈육을 포기하라고 들린다. 그리고 나의 N성향이 자꾸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간다. 재판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상을 하다보면, 앞에 있는 아이에게는 입을 다물게 된다.
나는 돌을 던지지 않았는데 개구리가 아팠다고 한다. 사실 내가 돌을 던진 걸까? 이것도 돌인 거니? 무죄라고 판명나도 내가 교단에 계속 서 있을 수 있을까? 아이들도 아동학대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한다. 부모가 자신의 등을 때렸다며 선생님이 입에서 비속어가 나왔을 때에도 대수롭지 않게 ‘아동학대’라고 지칭한다. 무거운 잘못이지만 너무 가벼워졌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소중한 걸 모를 리 없다. 아이들을 무시하면서 교사를 선택했을 리 없다. 하지만 권리를 줄 거라면 그에 맞는 책임도 주었으면 한다. 교사에게 책임을 줄 거라면 그를 지탱할 권한도 주어야 한다.
셋째, 보복성 민원 및 신고.
보복성 민원은 다양하다. 다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아이를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기도 한다. 교사에게 보복하기 위한 민원들도 있다. 너무 친절하다가도 한번 어긋나면 민원들을 궁금증인 척 쏟아붓는 학부모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더 큰 건 아동학대 신고에 대한 보복이다.
통계상 많은 아동학대는 부모에게서 일어난다. 폭행,욕설도 있지만 가장 빈번한 건 방임이다. 그러한 징후들을 지켜보다 교사가 신고를 하면 희한하게 학부모가 눈치를 챈다. 신고할 사람이 몇 없으니 가장 먼저 의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슬쩍 떠본다. 부모인 자신을 신고했다는 것, 그로 인해 교육을 들어야 한다는 것 등의 억울함을 빈번한 민원으로 푼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연락이 온다. 그래서 교사는 점점 내몰리게 된다. 결국 그 아이에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게 한다. 놀다 싸우는 일도, 활동을 하다 다치는 일도 없다. 역동적으로 노는 일도, 색다른 수업을 하는 일도 없게 되는 거다. 아이를 위한 제도들이 아이 주변의 어른들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어 버렸다.
진지한 걱정이지만 너무 막연하기에 풀어놓기 민망한 것들이었다. 이외에도 도촬,녹음,수업방해 등 스스로를 내던져 괴롭게 하는 상상들이 있다. 하지만 안다. 우리 모두 각자만의 말도 안 되는 불안에 떨고 있다. 내 아이가 차에 치이면 어쩌나, 홀로 남게 되면 잘 살 수 있을까. 부모가 가지는 불안도 크다.
‘불안 세대’라고 불릴 만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우리. 생존에 꼭 필요하지만 삶을 초조하게 하는 불안을 아이들에게는 덜 전하고 싶다. 나는 내게 세뇌라도 하듯 아이들에게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다고, 너를 돕는 이들이 가득한 미래를 살게 될 거라 말한다.
+작은 이야기 한 토막+
이것도 아동학대라고 신고될까봐 잘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선을 넘을락말락하는 장난을 칠 때면 나도 웃으며 받아줬다. 바로 어깨 마사지로! 가녀리지는 않아도 여성이다. 그래도 아이들에 비해서는 아귀 힘이 월등히 세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일로 와”
꾸와악
“아악, 선생님!”
“너 어깨가 많이 뭉쳤다?”
“어, 선생님 저도요!”
꽈악
“악!”
“휴대폰을 얼마나 하면 이렇게 돼”
“선생님 저도 저도!”
“다음은 저요!”
잠깐, 지금 누가 벌 받고 있는 거니? 내 손가락이 더 아파 비장의 무기는 한 달을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