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화 Apr 28. 2024

독백, 나의 회고록. 11.

h에게.


언젠가 한 번쯤 너에 대해 글로 남기고 싶었다.

한때 나의 연인이자 친구였던 이제는 나의 조각이 된 h에게.




너와는 소개팅으로 만나게 되었다. 소개팅을 안 좋아하는 나인데 친한 언니의 간곡한 바람에 결국 승낙했고 그렇게 사진을 교환했다. 사진 속 너는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


너에게 연락이 오고 그렇게 우리는 첫 약속을 잡았다.

‘그럼 그날 만나요.’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 소개팅은 원래 이렇게 심플한 건가. 오히려 좋았다. 사실 너도 소개팅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소개팅 당일. 너와 만나기 전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면서 고민했다. 그냥 나가지 말까. 약속을 취소할까. 하지만 소개해준 언니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이 가까워졌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로,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약속 장소로 나갔다.


별 기대 없이 나간 나와 다르게 약속 장소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너의 얼굴은 기대감에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살짝 미안해졌다.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나올걸. 제대로 말리지 못해 뻗친 머리를 하염없이 만지작 거렸던 것 같다.


우리는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러 갔다. 너가 미리 알아본 곳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내가 파스타를 먼저 뜨려고 하자 너는 재빨리 집게를 잡고 나의 접시에 파스타를 덜어주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웠다. 나도 너에게 한 스푼의 진심을 전했다.

‘파스타 접시에 덜어준 사람 처음이에요.’

내 말에 너는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피자도 먹으라며 피자도 접시에 덜어주었다.

풀어진 분위기 속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계속 이어졌던 우리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드는 나를 보던 너의 그 눈빛을 기억한다. 그 눈빛에 수줍어진 내가 고개를 푹 숙여 커피잔을 만지작 거렸을 때, 너는 커피잔을 쥐고 있는 나의 손가락을 톡톡 치며 ‘나도 그랬어.’라고 따쓰한 공감을 해주었다. 그때 나의 얼굴도 너처럼 상기되어 있었을까.


우리는 바로 두 번째 약속을 잡았다. 바빴던 너의 스케줄 중 잠깐이라도 비어있던 시간이었다. 점심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잠깐이었는데 그래서 나한테 미안하지만 그게 가장 빨리 나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고 나는 그래도 좋다고 답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역 계단에서 걸어 올라오던 나는 너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나를 발견한 너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너는 ‘가자.’라고 하며 반갑게 흔들던 나의 손을 덥석 잡아 이끌었다. 두 번째 만남인데 손을 잡는다고? 속으로 나는 굉장히 놀랐지만, 잡힌 이 손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이 손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꼭 잡았던 것 같다.


우리가 연인이 되는 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너와의 연애는 처음인 게 많아서 서툴렀지만 그래서 설레었고 그래서 즐거웠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데이트를 하던 나에게 너는 충격고백을 했다.

‘나 실은 유학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현실인식이 잘 안 되었다. 그럼 소개팅은 왜 받은 거야?

본인도 원래 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친구가 한번 받아보라고, 잘 안 될지도 모르지 않냐고 해서 나갔던 거였다고. 근데 내가 나왔고 자기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역시 내가 너무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고 미안하다며 너는 나를 안아주었다. 근데 나는 그걸 뿌리치지 못했다. 사실 속으로 욕했다.

이 약아빠진 자식.


유학 가기 전까지 우리는 시간만 되면 만났다. 앞으로 만나지 못할 날들을 당겨 쓰듯이. 그렇게 우리의 장거리연애가 시작되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님의 권유로 학과조교로 일하게 되었고, 너는 대학원 입학을 위한 준비로 해외에서 어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걱정한 것보다 우리 연애에 적신호는 없었다. 너도 나도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았고 시간이 될 때 통화를 하며 소소하게 일상을 공유했다. 전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 나인데 너와 하는 전화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휴대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우리는 시시콜콜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갔다.


물론 중간중간 우여곡절들도 있었지. 한 번은 이유도 기억나지 않을 걸로 크게 싸웠고 일주일이 넘게 연락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우리 헤어지겠구나. 생각했다. 너는 그래도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했고 우리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는 너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전히 너는 너구나. 변함없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고 그런 나를 보고 굳어있던 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얼굴 보자마자 화가 풀려버릴 정도로 우린 아직 서로를 좋아하고 있구나. 그게 어쩐지 든든했다.


하지만 장거리연애의 한계는 결국 찾아왔고, 더 이상의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던 우리는 이별을 선택했다. 어느 여름의 끝에 만난 우리는 어느 여름의 시작에 헤어졌다.


너와의 이별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눈물샘이 고장 난 듯 툭하면 눈물이 넘쳐흘렀다. 갑자기 툭. 어, 왜 이러지. 왜 이러지. 멈추지 않는 눈물에 당황하듯 닦아내는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약이었고 기억은 아름답게 미화되었다.


2년 뒤의 여름, 너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고 있어?’라는 안부의 연락에 나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대학원 과정을 다 끝내고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 너는 취업을 해 직장인이 되어있었다. 안정된 모습으로 나에게 연락하고 싶었다고 너는 말했다.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너는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어색한 듯 익숙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몇 번 너와 만나며 옛 생각이 많이 났다. 묻어두었던 너와의 좋은 기억들이 잃어버린 색을 되찾은 듯 선명하게 또렷해졌다. 한 번 헤어진 사람과 절대 다시 만나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다니던 내가 너의 다시 만나보자는 말에 얘라면 괜찮지 않을까? 해버렸을 정도로.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너와는 사실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한 추억이 많았고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아 하면 너는 어 했고,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각자가 어떤 하루를 보낼 건지 알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마지 동기화라도 된 듯 훤히 알고 있어서, 매번 이야기하다 보면 ‘어떻게 알아?’ 놀래하며 웃었다. 연인이라기엔 친구 같은 편안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래서 그게 우리에게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쩐지 우리에게 가장 좋았던 그때에 머물려 했던 것 같다. 미래가 아닌, 현실도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더 이상 그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기 어려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우리는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느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다시 다가올 우리의 이별을 준비했다.


데이트를 하고 평소에 술을 먼저 마시자고 하지 않는 너가 오늘은 술 한잔을 하자고 말했다. 오늘이구나. 나는 그러자고 했다. 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지만, 빌리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하지 못하고 외면해 왔던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의 결말은 너무나도 뻔히 보였지만 너는 나에게 먼저 헤어지자고 못했고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같이 노래방을 한 번도 같이 가본 적이 없네.’ 나는 너에게 갑작스럽게 노래방을 가자고 제안했고 너는 수긍했다. 코인노래방으로 간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에게 노래도 불러주고 노래도 들으며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헤어지던 길에 나는 너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거의 안 해본 게 없어. 다했다. 그러니.

‘이제 너가 만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아.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안녕.’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진정한 끝을 맞이했다. 붉은 장미가 만발했던 6월의 맑은 날이었다.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너와 함께 걸었던 어느 저녁날을. 함께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너는 밤하늘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봐, 오리온자리야.’ 유독 낮게 느껴지던 밤하늘. 네가 가리킨 손가락 끝엔 밝게 빛나는 별자리가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 그렇게 읊조리며 나도 손을 뻗었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나는 그날의 오리온자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너에게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갈림길 앞에 선 우리는 서로를 보며 미소 지은 후 짧은 인사를 끝으로 서로의 길을 찾아 앞을 보며 걸어간다. 너도 나도. 아마도 뒤는 돌아보지 않겠지. 걸으면 걸을수록 기억은 덧칠되어 희미해지겠지. 선명함은 점차 그 빛이 바래 퇴색되어, 어쩌면 미화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렴풋 알 수 있는 건 어쩐지 서로는 잊히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퍼즐이었고 하나의 조각이었으며 빠진 빈자리는 채워지지 못하고 그렇게 흔적만이 오래 남을 테니까.



내가 남기고 싶었던 글은 여기까지.

안녕, 나는 다시 한번 너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백, 나의 회고록.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