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쟁탈 눈치게임의 시작.
이번 수업부터 공방 가는 시간대를 바꿨다. 원래 1시에 갔었는데 오전 11시로, 2시간 앞당겼다.
여기엔 아주 고달픈 사연이 있다.
열심히 즐거운 물레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나. 토요일의 물레는 나에게 힐링칠링의 시간이었다.
그런 나의 소중한 시간을 처참하게 깨부순 불청객이 등장했다.
바로 나의 직장동료인 일본인 W.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는 정말 맞지 않는 성향이라고 계속해서 느껴졌고 결국 대하기 어색해진 내가 점점 직원 W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다행히 업무적으로 그렇게 접하지 않기도 해서 나름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 W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도예 배우고 있죠? 저도 관심 있는데 혹시 다니고 있는 공방 견학해 볼 수 있을까요?'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내가 도예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직원 W가 관심을 가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그리고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견학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여기도 계속 수업이나 원데이클래스가 있어서 방해가 될 수도 있거든요. 차라리 원데이클래스를 신청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일본어를 못 하세요.라고 뒤이어 말했다.
그렇다. 사실 직원 W는 한국어를 못한다. 그런데 어째서 대화가 통하는가.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내가 힘들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직원 W는 괜찮다고 바디랭귀지로 어떻게든 대화가 통할 거라고 말하며 원데이클래스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정말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다시 한번 에둘러 말했다.
'신촌이나 홍대 쪽에 아마 일본어 가능한 공방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직원 W는 끈질겼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다니는 곳이 좋을 것 같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선 하고 싶은 일자를 말해주면 선생님께 가능한지 한 번 물어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정말 울며 겨자 먹기가 이런 거구나.
선생님도 조금 당황했던 것 같았다. 한국어 정말 하나도 못하세요? 물으셨고 아주 간단한 인사말밖에 모른다고 답했다. 고민하시던 선생님은 혹시 통역을 해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간단한 건 해드릴 수 있는데 저도 전문용어들은 잘 몰라서 괜찮을지...'
일상대화라면 몰라도 도예를 가르치며 사용되는 언어나 도구들을 일본어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선생님은 고민하셨지만 사실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한번 해보겠다며 해당 일자에 가능한 시간대를 알려주셨고 나는 직원 W한테 전달했다.
직원 W는 가장 빠른 시간대인 3시로 하겠다고 하면서 그 시간대에 나도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통역을 해야 하는 내 모습이 점차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래, 괜찮아. 하루만인데.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 설마. 혹시나 싶긴 했는데 원데이클래스를 너무나도 만족스럽게 즐긴 직원 W가 이제는 정기수업도 듣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부터 직원 W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표정관리가 안 될 거 같아서. 근데 내가 뭐라고 하겠다는 사람을 막겠는가. 나는 언제부터 수업을 받을 건지 물었고 직원 W는 이 날부터 받겠다고 말했다.
그날은 내가 결혼식이 있어 공방을 못 가는 날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근데 나는 이날 결혼식이 있어 공방을 못 간다고 말했다. 직원 W는 그러냐며 알겠다고 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근데 걱정인데요.'
나는 어떤 게 걱정이냐 물었고 돌아온 답변은 나를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말이 안 통해서요.'
너무 속 보이는 답변이지 않은가. 괜찮다면서요. 어떻게든 해볼 거라면서요. 그런데 왜 내가 없다고 하니까 갑자기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 믿는 구석이 나였다는 게, 나를 자신의 통역기로 쓸 생각이었다는 게 화가 났다. 속 안에서 날뛰는 감정들을 꽉꽉 억누르고 차근차근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그냥 일본어가 가능한 공방을 다니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분명 신촌이나 홍대 쪽에 그런 공방 있을 거예요. 사실 도예가 말이 통해도 배우기 어려운 건데 말이 안 통하는데 배우는 건 더 어렵고 무리일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제대로 배우고 싶은 거면 일본어가 가능한 곳에서 수업을 듣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진지한 나의 말에 직원 W는 당황한 듯 또, 아니라고, 괜찮다고, 어떻게는 해보겠다는 근거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 그 말 꼭 지키세요.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직원 W는 내가 공방에 가는 시간인 1시에 자신도 나가겠다고 했고 나는 우선 알겠다고 선생님께 얘기해 두겠다고 했다.
그렇게 직원 W를 마주치지 않는 결혼식 주간이 지나고 결국 직원 W와 마주하게 되는 이번 수업날이 온 것이다.
같은 시간인 1시부터 가면 아무래도 중간중간 내가 통역해 주거나 도와줘야 할 상황이 생길 거 같아서 최대한 겹치는 시간을 짧게 줄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공방에 가야 한다는 것부터 스트레스였지만 나는 정말 마음 독하게 먹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긴 회사가 아니고 나도 내 귀한 시간과 돈을 쓰며 배우는 거니까. 나를 나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께도 미리 말해놨었다. 시간을 앞당기겠다고. 주말까지 회사사람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니 선생님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 한켠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직원 W도 시간을 바꿔 더 빠르게 나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자꾸 찾아왔다. 에이, 설마.
그렇게 11시쯤 공방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원장선생님이 계셨다.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거의 내 지정자리인 가운데 물레자리에 앉아 물레성형을 먼저 할 준비를 했다. 오늘은 확실하게 만들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물레를 돌렸다. 원장선생님은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전보다 기본이 많이 잡혔다고 칭찬해 주셨다. 혹시나 하다가 막히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해주셨고 나는 기쁘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렇게 물레에 집중하고 있는데 문 쪽이 소란스러웠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문 쪽에는 매주 마주치는 정기수강생분과 함께 직원 W가 서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나와 직원 W는 서로 당황한 듯 어색한 인사를 했다. 직원 W의 얼굴에 가득 어려있는 표정에서 나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직원 W는 지금 내가 앉은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굴러온 돌이 지금 박힌 돌을 빼려고 하고 있다는 걸.
어쨌든 오늘의 승자는 나였다. 그리고 나는 내 작업에 집중할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고개인사를 한 나는 다시 물레성형에 집중했다. 여긴 회사가 아니고 나 또한 수강생일 뿐이니까.
다시 만들고 싶었던 것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물레를 돌리다 보니 금방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원장선생님이 점심 먹으러 나가시기 전에 매주 마주치는 정기수강생을 직원 W에게 소개해줬다. 정기수강생분은 일본에서 오래 생활을 하셔서 일본어를 아주 잘하시는 분이었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누던 중 직원 W가 자기도 아직 밥을 안 먹었다고 점심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주변 지리를 잘 모른다고 덧붙이니 고심하던 정기수강생분이 원장선생님께 직원 W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권유해 주셨다. 마음은 정말 감사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아침을 늦게 먹기도 했고 사실 직원 W랑 같이 밥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불편한 사람이랑 같이 밥 먹으면 먹다 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집중의 흐름도 끊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세 분이서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혼자만 남은 공방에서 마음 편하게 작업을 이어서 했다.
사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유튜브 영상으로 본 위스키잔이었다. 일본도예가의 영상이었는데 위스키를 즐겨마시는 건 아니지만 잔 자체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억을 떠올리며 열심히 만들어보긴 했지만 이 중 어느 하나 비슷하지 않았다.
그래도 굽깎기 때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굽깎기를 할 준비를 했다. 저번에 만들어 두었던 기물들을 꺼냈다. 길이가 그래도 조금 있던 것들이어서 4개 중 2개는 컵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굽깎기 전 손잡이를 먼저 만들었다.
건조상태가 비슷해야 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거 같아서 손잡이를 안 달아도 되는 기물들을 먼저 집어 들었다.
굽깎기를 시작하려는데 점심식사를 마친 세 분이 공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인사한 후 다시 물레판 위에 시선을 두려고 했는데 어느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정기수강생분이 말을 거셨다.
'여기 다닌 지 얼마나 되셨다고 했죠?'
'저요? 음, 올해 1월부터 다닌 거 같아요.' (그러나 실은 2월부터였다.)
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벌써 이렇게 실력이 느셨냐며 자기가 만든 거랑 큰 차이가 없다고 해주셨다. 네?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이 만든 기물들로 고개를 돌렸다.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성도. 나는 손사례를 치며 아니라고 아직 훨씬 부족하다고 답했다. 정기수강생분은 아니라고 정말 실력이 빨리 느는 거라며 나를 칭찬해 주셨다. 쑥스러워진 나는 머쓱하게 얼굴을 붉히며 감사하다고 했다. 여기분들은 다들 칭찬이 너무 후하신 것 같아, 참 좋으신 분들이다.
이 기분 좋음을 그대로 살려 굽깎기에 담아내고 싶었다. 조금 더 정신을 바짝 차려 물레판에 집중했다. 비교적 제일 낮았던 기물은 잔으로, 좁고 길게 뽑았던 기물은 화병으로 굽을 깎았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굽이 잘 깎였고 모양도 잘 잡혔다. 이 기세 그대로 남은 컵으로 만들 남은 기물 2개도 잘 깎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 저 때 내가 정신력이 많이 떨어졌고 피로했어서 물레성형 때부터 망한 거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남은 저 두 개의 기물은 중심이 확연하게 제대로 안 잡혀있었다. 굽깎기를 할 때도 중심을 잘 맞춰야 하는데 이미 중심이 틀어진 상태였다 보니 어떻게 해도 예쁜 모양으로 굽이 깎이지 않았다. 하나는 그래도 어찌어찌해 봤는데 결국 구멍엔딩을 맞이했고, 다른 하나는 정말 원형 모양이 안 나와서 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미리 만들어둔 손잡이는 그 쓸모를 잃어 같이 반죽통행이 되었다.
그래도 두 개라고 성공한 게 어디야.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벌써 흘러 어느덧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서둘러 뒷정리를 한 후 두 번째로 나온 나의 완성작들을 확인했다.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확실히 초반보다 완성도가 괜찮아진 게 보였다. 다이아몬드 사포로 밑굽을 부드럽게 다듬어주었다. 원장선생님께 소성비 결제를 부탁드렸는데 선물이라며 이번에는 소성비를 안 받겠다고 하셨다. 너무나도 감사해서 감동의 인사를 두 번이나 드렸다. 원장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미션을 주셨다.
오늘은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낮게 만드시긴 했지만 여태까지 만든 것들이 전반적으로 낮고 작았다며 이제 앞으로는 공방에 오면 30분 정도는 조금 더 크고 길게 뽑아보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셨다.
그건 그냥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무조건 연습을 해야만 한다고, 작품을 만들 듯 예쁘게 안 만들어도 되고 하다가 망치면 버린다는 생각으로 연습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앞으로도 도예를 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네! 앞으로 공방 오면 길게 뽑는 연습 해볼게요!
선생님과 수강생분께 인사를 드리고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공방을 나왔다. 어느덧 직원 W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그래, 나는 이렇게 나한테 집중하면 돼. 소중하고 애틋한 나의 물레를 오롯이 즐기면 돼.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자리쟁탈.
그렇게 쉽게 가운데 물레자리를 직원 W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좋아, 다음부턴 30분 더 일찍 공방에 가야겠어.
이렇게 자리쟁탈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 싸움에서 이겨 나의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이 공방의 센터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