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이즈 웰.
감기에 걸렸다. 처음엔 목이 조금 불편한 정도였는데 그다음 날부터 숨 쉬는 게 아팠다. 들숨날숨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평일에 병원 갈 시간이 안 나서 주말, 공방 가기 전에 병원을 들렀다 가게 되었다.
9시쯤 나와 집 근처 병원으로 갔는데 이미 환자가 너무 많아 벌써 오전접수가 마감되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을 찾아보다가 공방 가는 길에 이비인후과를 발견해서 거기로 갔다. 다행히 거긴 대기손님이 10명 정도밖에 없어서 접수를 하고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지나있었다.
'11시 넘어서 공방 가겠는데.' 사실 저번 수업 때 직원 W가 가운데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더 일찍 공방에 갈 생각이었는데 병원대기가 길어서 오히려 저번보다 더 늦게 공방에 도착할 것 같았다.
직원 W가 저번보다 더 일찍 공방에 올까?라는 불안한 마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초조해지는 마음에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다 갑자기 탁 맥이 풀려버렸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람.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냥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 스트레스받기엔 콜록거리며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 그냥 마음을 비우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혼자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작 직원 W는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한편으로 궁금해지기도 했다. 과연 내가 공방에 도착했을 때 직원 W가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병원진료가 끝나고 약처방을 받은 후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공방을 향했다. 공방 가는 길에 있던 병원이어서 금방 공방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이미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긴 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앞치마를 매고 있는 직원 W를 바로 마주쳤다. 정말 일찍 왔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당황한 듯 가볍게 인사한 직원 W는 나보다 더 빠르게 가운데 자리로 가 자기 짐을 올려두었다. 그 모습에 그냥 웃음이 나왔다. 마음을 비우긴 했지만 정작 눈앞에서 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소란스러워지긴 했다.
아니야, 가운데 자리를 내 자리라고 할 수도 없는 걸. 일찍 온 사람이 임자지 뭐.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물레복장으로 환복 하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직원 W는 저 자리에 앉기 위해 일찍 올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매번 자리쟁탈을 위해 스트레스받으며 공방에 오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왼쪽 자리에 앉았다. 여기 물레발판 뻑뻑해서 속도조절하기 쉽지 않은데, 약기운에 살짝 몽롱하기도 해서 걱정되었다. 오늘 괜찮을까. 뭐,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내 자리는 여기가 될 것이니 친해지고 익숙해질 수밖에.
저번 수업 때 원장선생님이 준 미션. '앞으로 공방에 오면 30분 정도는 길게 뽑아보는 연습 해보세요.'
물레성형할 도구들을 세팅하고 이번에는 소지양을 평소보다 많이 했다. 선생님이 보시곤 놀란 듯 이야기하셨다.
'오늘은 소지양 많이 하시네요?'
'저번에 원장선생님이 미션을 주셔서요. 앞으로 공방 오면 30분 정도는 길게 뽑아보는 연습 해보라고, 그러려면 소지양이 많아야 할 것 같아서 늘려봤어요.'
내 말에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 주셨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 잡아보았다.
낯선 물레판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되도록 빨리 친해지자.
왼쪽 물레발판은 역시나 뻑뻑해서 속도조절이 섬세하게 되지 않았다. 내가 적응하거나 길들이거나, 어찌 되든 노력해야 했다. 중간중간 적응이 안 돼서 고비가 찾아오긴 했지만 어차피 지금 이 시간은 무언갈 만들려는 게 아닌 길게 뽑아내는 연습을 하는 거였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길게 뽑아내는 건 역시나 쉽지 않았다. 기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손가락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부분도 길어지는데 그걸 균일하게 끌어올리는 게 맘처럼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시도는 어찌어찌 올려보았지만 중간중간 기벽을 끌어올리는 손가락이 힘에 밀려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결국 삐딱한 형태가 되었다. 두 번째 시도는 아예 휘청거릴 정도로 크게 어긋나는 바람에 기벽이 무너져버렸다. 한 번 더 해보고 싶긴 했는데 남은 소지양이 적어서 마무리는 작은 병을 만들었다. 이렇게 총 세 번 돌렸을 뿐인데 1시간이 지나있었다. 음, 원장선생님은 어떻게 30분 동안 5개 뽑아보라고 하셨던 거지...? 계속 연습하면 그렇게 될 수 있으려나.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연습한(그리고 망한) 원통은 반죽통에 미련 없이 버리고 작은 병은 한 곳으로 빼두었다. 저번 수업 때 만들어놓은 기물들이 많았어서 그만큼 굽 깎기를 해야 할 것도 많았다. 2시간 내에 다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선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마음으로 굽 깎기를 시작했다.
저번에 만들고 싶은 잔모양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참고해서 굽 깎기를 했다. 모양이 제각각이긴 했지만 되도록 비슷하게 나올 수 있게 최대한 집중해서 굽을 깎았다. 중간에 하나, 마음이 급해져서 실수를 했지만 안타까워할 시간도 없었다. 정말 기계처럼 굽 깎기를 하고 하고 또 했다. 어느덧 2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기물이 3개나 되었다. 어느덧 마무리할 시간이기도 했고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해서 남은 3개는 도저히 오늘 못 할 거 같아서 선생님한테 물어보았다.
'선생님, 제가 다음 주에 못 나와서 그다음 주에 올 것 같은데 남은 기물들 그때 굽깎기 해도 괜찮을까요?'
요즘 날씨가 포근해지면서 전보다 기물이 마르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에 혹시나 2주의 기간 동안 기물이 너무 건조해져서 굽을 못 깎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은 기물들을 만져보시곤 아마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분이 최대한 날아가지 않게 비닐로 꽁꽁 덮고 스트리폼 박스를 닫았다. 제발 무사히 버텨주길.
구멍엔딩을 맞이한 기물 하나는 반죽통에 버리고 다른 기물들은 한편에 모아두었다. 그러던 와중 초벌이 완료된 내가 만든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 다듬고 가야 그다음에 수업 왔을 때 완성품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녹초였지만 눈에 들어온 이상 그냥 둘 수 없었다.
우선 물레자리를 마저 정리한 후 사포를 들고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저번에 만든 컵과 그릇, 잔들이었다. 컵 하나는 건조과정 중 손잡이에 금이 가서 굽지 못했고 나머지 두 개는 잘 살아남아주었다. 세 개 다 못 만나게 될까 걱정되었는데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건 열정적 사포질.
6개나 사포질을 하려니 역시 팔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 그래도 사포질을 열심히 해야 매끄러운 표면이 나오기 때문에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장장 30분 동안 열심히 사포질을 한 후 각각 어울릴만한 유약을 연필로 표시해 두었다. 오늘은 3시간을 안 넘기려고 했는데 역시나 이미 시간은 훌쩍 넘어있었다.
선생님께 다시 한번 다음 주에 못 나온다고 말씀드리며 그다음 주부터는 다시 원래 시간대로 나오겠다고 했다. 자리쟁탈의 승자는 직원 W. 그의 손에 승자 목걸이를 쥐어주었다. 그냥 매번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것보단 내가 물러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왼쪽 물레자리도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테니까. 굳이 아등바등할 필요 없이. 직원 W를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내 소중한 시간을 오롯하게 보내면 된다.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알 이즈 웰. 모든 것은 결국 잘 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