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에서 우리는 뭔가 작은 깨달음을 얻은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을 함께 지켜봤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상호 교차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
이 말은 겉보기엔 그럴 듯 하지만, 이토록 간단한 문장으로 ‘존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럴싸한 말일수록 가장 먼저 의심부터 할 줄 아는 예리한 독자님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씩 뜯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이전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을 인식이라고 하고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존재'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인식’ 그 자체에 대해서도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어린 소년이 완성한 작은 철학을 다시 풀어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로의 인식이 교차하며 같은 것이라는 걸 증명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똑같이 인식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다른 것을 보고 같다고 하거나, 같은 것을 보고 다르다고 말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 이론은 더는 존재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철학에 취해 있던 소년에게 문득 어디선가 주워들은 논쟁거리가 떠오르는군요. ‘내가 보는 노란색과 네가 보는 노란색이 똑같은가?’하는 논쟁입니다. 아니 노란색이 당연히 노란색이고, 내가 보든 네가 보든 똑같은 노란색이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다음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여기 초록색을 노란색으로 보고, 노란색을 초록색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가을철 은행나무가 그에게는 초록색으로 보이고, 한여름 푸른 산이 노란색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겪은 사람들의 말과 책에 의하면 은행나무는 노란색이고, 산은 푸르른 초록색이라고 하는군요. 그렇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은행나무는 노란색, 숲은 초록색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반대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나중에 ‘감각질(qualia)’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철학적 주제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인식이 모순될 가능성을 짚어보자는 건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색을 반대로 보는 사람이라니, 너무 억지스러운 예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것을 보면 같은 것을 인식한다.’는 달리 생각하기 어려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 느껴지니까요. 만족하지 못한 소년은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좀 더 현실적인 다음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여러분은 무슨 언어로 생각하시나요? 이 글을 읽고 계실 분들은 대부분 한국인일 테고, 한국어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배우고 자란 사람이라면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생각할 것입니다. 탁자에 놓인 사과를 보고, 여러분은 ‘웬 사과가 여기에 있네!’ 하고 말합니다. 마침 어떤 한국말을 잘하는 미국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그러게요, 맛있어 보이는 사과네요!’라고 답합니다. 똑같이 사과라고 했지만 정말 그 외국인도 머릿속에서 ‘사과’라는 단어로 사물을 인식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고 ‘Oh, that’s an apple. Apple is [사과] in Korean.’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엔 사과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모순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인식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인 언어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머릿속으로 인식한 내용이 다른데도 같은 언어로 말했다면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보이기만’ 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살펴본 이야기들을 통해, 존재를 논하기 위해 가져온 ‘인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모두에게 똑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가 드러났군요. 이런 문제를 논하기에 적절한 감각질(qualia)이라는 개념도 있지만, 저는 이를 ‘합의된 혼돈’이라는 새로운 말로 다듬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알 수 없는 혼돈이지만 같은 언어로 합의하여 대화하고 있다는 뜻을 담은 개념입니다. 어찌 됐건, 존재가 무엇인지 과학 이상으로 결론짓고 싶던 소년의 야망이 스스로 꺾인 순간이군요. ‘합의된 혼돈’ 속에서 상호 교차 인식은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는 실패한 이론이 된 걸까요? 그러나 소년의 작은 철학에는 분명 버리기엔 아쉬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만든다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가 각자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인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부모님, 유년기의 친구들, 대학교의 선후배, 그리고 직장 동료와 자신만의 새로운 가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살면서 만나는 모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설사 그 바탕이 혼돈일지라도 서로 같은 걸 본다고 믿는다면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존재를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소년은 자기 철학의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