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타자'와 '환대(hospitalité)' 개념을 중심으로
지난 글에서는 시리아인-독일인 작가 마나프 할부니(Manaf Halbouni, 1984- )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까지 살펴보았다. 그의 대부분의 작업은 자신이 나고 자란 시리아는 물론, 그 주변 문화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의지로 고향 시리아를 떠났음에도 새로이 정착한 또 다른 고향 독일에서 지속적으로 시리아와 연관된 작업에 몰두해 온 데에는 이방인에 가해지는 타자화로부터 환대를 제안하고, 나아가 유대를 찾고 형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어디에나 속하고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이-존재'로서 할부니의 작업을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환대'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일찍이 자신의 저서 『환대에 대하여(De l'hospitalité)』(1997)를 통해 타자의 출몰, 즉 이방인을 맞이하는 환대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될 이방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였다. 환대에 관한 사유를 전개한 배경에는 실제로 데리다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이었다는 사실과 프랑스에서 이주민, 이방인에게 가해진 박해를 경험했던 일이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환대에 대하여』를 저술하던 당시,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이민통제 정책과 외국인들의 노동시장 진출 억제 정책 등을 삭제하는 새로운 국적법안과 이민법이 확정되었고, 외국인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환대의 문제가 논의의 중심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우리'와 '타자'라는 틀 짓기의 문제가 잇따르던 배경 속에서 환대라는 개념은 이항대립의 구분과 차별로부터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환대 개념을 정리하기 전에 데리다의 '타자' 개념과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철학사상에서 타자를 논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 칸트와 헤겔,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주체철학이 부각되면서부터였다. 주체철학자들에게 타자는 주체에 의해서 인식되는 수동적 개념이자 대상이었다. 이후 후설이 상호주관성에 근거하여 타자에 선험적 주관성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본격적인 타자철학을 개진한 후대 학자들의 입장에서 후설의 타자는 여전히 주체 중심적 시각에 머물러 있었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후설이 타자를 타자로서 파악하지 않고 절대적 자아의 지향적 의식의 대상, 객체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주체에 귀속되어 왔던 타자를 분리하고, 주체에 외재하는 영원한 '절대적 타자'를 주장했다.
해체주의자 데리다는 레비나스와 다르게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주체든 타자든 서로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다. 주체의 존재 의미는 타자에 의해 대리보충되기 때문에 타자는 주체의 존재를 가능케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타자의 존재를 온전히 배제한 순수한 주체란 없다. 타자 역시 주체와 연관되지 않는 순수한 절대적인 타자일 수 없다. 그래서 데리다의 타자는 주체에 선하여 존재하고, 규정할 수 없는 타자는 주체 안에서 '외상적 핵(traumatic kernel)'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존재방식은 '먹는 행위'에 비유된다. 먹는다는 것은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토템과 터부 Totem und Tabu』(1912-1913)에서 서술하는 원초적 부친살해에 대한 가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증오의 대상이면서도 자신들의 모범이 되는 찬미의 대상인데, 증오의 대상을 제거하기 위해 원초적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와 같아지기 위해 그를 먹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먹는 행위는 타자를 동일화, 내면화하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때 타자를 성공적으로 내면화하면 타자성이 상실되고, 이로 인해 타자를 존주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지만, 반대로 내면화에 실패하면 타자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성공이 실패가 되고 실패가 되레 성공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데리다는 이를 '애도(mourning)'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애도는 모든 의미 있는 상실에 대해 슬퍼하고 기리며 잊고자 하는 행위다. 애도를 통해 상실된 대상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반면, 잊지 않기 위해 애도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도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모두 상실된 대상에 대한 충실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불충실한 행위가 된다.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애도, 성공적인 내면화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렇듯 데리다의 타자는 '나'에게 완전히 삼켜져 내면화되지도 밖으로 나와 거부되지도 않은 채 목에 걸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며, 마치 유령(phantom)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틈에 위치해 있는 틈의 존재, '사이-존재'라 할 수 있다.
즉, 타자는 주체와 공통성이 없는 온전한 하나의 다른 존재, 외재적 존재가 아니다. 데리다가 보기에 타자가 주체를 가능케 하고 주체가 타자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주체와 타자는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연결되어 있는 관계인 것이다. 주체의 내부에서 타자는 '나'에게 물음을 던지며 문제선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항상 타자에게 열려있으며, 타자에 사로잡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만나며 정립된다.
대화 속에서 타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그(타인)의 표현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그(타인)는 사유가 그 표현에서 간취하는 관념을 매 순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아의 능력을 넘어서서 타인으로부터 받아들임을 뜻한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영 외 2명 (역), 서울: 그린비, 2018, p. 57 참조.
레비나스는 주체가 절대적 타자의 '얼굴(visage)'을 통해 맞아들인다고 표현한다. 타자가 얼굴로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자성이 표상된다. 이 타자성의 표상에 대해서는 신의 현전을 의미하는 용어인 '에피파니(épiphanie)'로 설명했고, 주체가 자신 이외의 다른 온전한 존재를 맞아들이는 이 같은 행위를 ‘환대’로서 제시했다. 위의 인용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맞아들임의 행위는 자아의 능력을 초월하여 받아들이는 정도의 수용성을 띠는데, 여기에서 데리다는 '받아들임'을 수용하는 문제에 방점을 두어 타자에게 열려있는, 환대하는 맞아들임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언어학자 에밀 뱅베니스트(Émile Benveniste, 1902-1976)에 따르면 '환대(hospitalité)'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hospes'는 '손님', '적'을 뜻하는 'hosti-'와 '주인'을 뜻하는 'pet-(pot-)'이 합쳐진 용어로, '손님(또는 적)의 주인'을 의미한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환대를 통해 주체가 받아들이는 타자는 항상 호의적인 손님일 수 없고, 주체를 공격할 수 있는 위험을 지닌 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주체가 맞아들이게 되는 타자(낯선 사람, 이방인)는 손님/적이라는 양면적인 존재이지만, 앞서 논의한 바에 따라 이방인을 환대하는 문제는 "일방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손님(타자)과 주인(주체)의 관계는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예로 든 플라톤(Plato)의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e de Sokrates)』은 손님(이방인)과 주인의 모호한 경계성이라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아테네의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같은 아테네 사람인 시민들과 재판관들을 향해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칭한다. 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변론을 함에 있어 그 자신이 재판소의 언어, 법과 관련된 수사학, 변론의 수사학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연설해야 하는 소크라테스는 그 순간에 이방인과 다름없다. 그가 실제로 외국인이라는 의미에서 이방인은 아니지만, 자신이 서있는 그 장소에서는 타자, 즉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법정 안에서 소크라테스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요인은 수사학 분야의 언어와 관련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한 나라가 외국인을 받아들이거나 추방하길 결정하는 사안에서 그 나라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두고 있다면 외국인은 그러한 법이 존재하는 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이 환대받기 위해서는 주체, 주인에게 강요된 언어로서 환대를 요청해야만 한다. 데리다는 이를 "첫 번째 폭력"이라 하며, 이방인이 환대를 받는 데 조건이라는 것이 구속될 수 있음을 발견하는 한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구속되는 이 문제가 가지는 양가성에 대해 밝힌다.
하여간 나는 여기 법정 언어에서는 완전히 이방인이외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이방인이었다면, 여러분은 내가 어린 시절의 악센트와 방언을 섞어 말하는 걸 분명 개의치 않았을 게요.
-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pp. 66-67 참조.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 일부를 살펴보면 그가 실제 이방인이 아니었음에도 이방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반면, 실제 (외국인으로서) 이방인에게는 법정 안에서 어떤 수사법에도 개의치 않을 권리가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에 속하는 존재보다 좀 더 관대한 처우를 받을 수 있는 '환대의 권리'를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가정하고 있는 위의 말에서 이방인의 언어는 환대의 권리 하에 어떤 조건으로서 구속성을 띠지 않는다. 그럼에도 데리다가 "첫 번째 폭력"으로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같이, 이방인에 대한 조건은 환대와 적대를 결정하는 요소로서 양가성을 드러낸다.
이 조건적 환대는 칸트가 말한 환대의 권리와 같다. 칸트는 환대의 권리를 "한 이방인이 타국의 땅에 도착했을 때 타국의 거주자에 의해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라고 하며 지구표면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것이라 말한다. 이방인에 우호적이며 열려 있는 환대로 이해되는 이 권리는, 그러나 일시적 체류의 권리, 친밀한 교제의 권리에 그친다. 칸트가 환대의 권리를 본토의 거주민과 교류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방인이 결코 정착할 수 없는 한계 지어진 환대이며, 이방인에게 환대의 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이방인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인에게 줌으로써 다시금 주체-타자의 고정된 관계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나 데리다에게 주체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 대리보충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인과 이방인의 절대적 등식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이 관계는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Oedipus at Colonus)」에서 오이디푸스와 콜로노스 주민의 대화를 통해 설명된다.
오이디푸스
"이방인이여, 이 딸은 자신을 위해 보면서 동시에 내 눈이 되어 주고 있다오. 딸의 말이, 운 좋게도 우리 궁금증을 풀어 주려고 그대가 왔다고 하는구려……."
이방인(콜로노스의 주민)
"무얼 더 묻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기부터 하쇼. 이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으면 안 되는 곳이오."
오이디푸스
"이곳이 어떤 곳이오? 어느 신이 이곳에 주재하오?"
이방인(콜로노스의 주민)
"그 누구도 여기에 정착은커녕 발 디디는 것도 안 되오. 여기는 공포의 여신들에게, 땅과 어둠의 딸들에게 속한 곳이오."
-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p. 78 참조.
오이디푸스는 사실상 콜로노스 주민들에게 이방인이고, 반대로 이방인 오이디푸스에게 콜로노스 주민들 역시 '이방인'이다. 서로가 서로의 이방인과 대화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가운데 던져진 '물음'은 이방인이 이방인에게 제기한 물음이자 이방인이 이방인에게 받은 물음이다. 타자(이방인)가 항상 우호적일 수 없는 이유는 이방인의 물음이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내부를 끊임없이 열어젖히며 '나'를 해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호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방인을 조건·규정에 따라 선별하는 작업은 결국 환대에 제한을 두는 것이므로 항상 환대 그 자체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환대의 의미 또한 변질시킨다.
"물음 없는 맞이하기"란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방문 또는 도래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더라도,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는 환대, 다시 말해 무조건적 환대를 의미한다. 요컨대, 주체가 고유성을 얻는 사적인 공간인 '집'을 개방하고, 이방인과 미지의 절대적 타자에게 장소를 내어주고, 주체의 '집' 안에 타자의 '공간내기'를 받아들이고, 주체가 만드는 어떠한 규정도 요구하지 않고 이름조차 묻지 않는 것이다. 미지의 이름 없는 타자가 도래할 때 무조건적 환대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 환대의 무조건적 수용은 적의를 선별할 규정이 없기 때문에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환대 이후 발생하는 여타 문제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기만의 자기-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는 보호하겠다는 주장에 의해 잠재적으로 이방인 혐오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나의 집에서 주인이고 싶고, 나의 집에 내가 원하는 사람을 맞이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나는 나의 '내-집'을, 나의 자기성(ipséité)을, 나의 환대 권한을, 주인이라는 나의 지상권을 침해하는 이는 누구나 달갑지 않은 이방인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원수처럼 간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타자는 적의에 찬 주체가 되고, 나는 그의 인질이 될 염려가 있는 탓이다.
-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p. 89 참조.
데리다는 유령과도 같은 타자의 출몰에 고유성을 빼앗기는 주체의 문제에서 무조건적 환대 역시 변질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주체는 '집'이 침범당할 때 마치 개인의 소유권이 압박당하는 것처럼 느끼고, 이러한 반응은 곧 사유화 반응, 이를테면 가족주의적,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반응으로 일어날 수 있고 외국인 혐오증으로 확대되어 결국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도 있다. 이방인을 환대함으로써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이방인을 맞이할 장소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적 환대는 주인의 지상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고, 주인은 더 이상 주인이 되지 못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인이 이방인을 잠재적 원수, 적의에 찬 주체로 간주하게 되면서 무조건적 환대가 환대를 더 제한하는 이율배반의 상황, 아포리아(aporia)를 초래한다.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분리되지 않는 모순적, 이율배반적 관계이다. 주인인 '나'는 내 '집'의 주인임을 공고히 하고자 내가 규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조건적 환대를 원한다. 무조건적 환대에서 주인은 배타적 권리를 포기해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환대를 가능케 하기 위해 이방인을 맞이할 장소의 주체여야만 한다. 조건적 환대는 무조건적 환대를 위한 조건으로 포섭되고 있다. 그러나 조건적 환대는 무조건적 환대를 요구하는 이방인의 물음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 생긴다. 데리다는 이 같은 환대의 아포리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는데, 그럼에도 아포리아를 견뎌냄으로써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과제인 것이다.
데리다는 "환대 행위는 시적(poétique)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시적'이라는 말은 '만들기', '생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포이에시스(poiesis)'에 어원을 둔 '생성'적 환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적 환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 너머에 있어 나의 통제가 불가능한 타자, 나의 목에 걸려 있으면서 나를 사로잡고, 해체하고, 또 능가하는 유령과도 같은 타자인 사이-존재를 환대하는 행위이다. 시적 환대는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 사이에 틈을 내어 개입하고 해체하면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이 틈의 '사이' 공간은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가능하게 할 수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데, 이에 따라서 주체가 정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불가능성까지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일련의 도주차량 작업들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었던 〈뿌리 뽑힘(Entwurzelt)〉(2014)은 내전이 발발하면서 고향의 뿌리가 뽑혀버리고 어디에도 '집'으로서 마음을 둘 수 없었던 시기, 그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를 찾고자 시도했던 결과였다. 더 이상 고향의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면서 '집'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졌고, 할부니는 중고차를 생필품 등의 물건들로 채워 생활공간으로 바꾸었다. 자동차 내부의 한쪽에 잠을 자는 공간이 마련되고 책상과 부엌이 놓임으로써 바퀴가 제거된 간이집이 형성되었다.
'집'이라는 장소는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집주인의 고유성을 함축한다. 할부니에게 '집'은 태어난 곳이자 잃어버린 땅인 시리아, 그리고 그가 이방인으로서 머물고 있는 -그러나 또한 그에게 이방인(국가)인- 독일에서 살아가는 장소가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독일은 그가 주인인 곳, 그가 이방인이 되는 곳, 그에게 이방인인 곳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곳이다. 이 구분되지 않는 영역은 할부니를 온전한 주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이방인이기도 한 그의 존재를 맞이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가운데 〈뿌리 뽑힘〉으로 제시된 '나의-집'은 그의 '집'에 대한 욕구의 실현이자 고유성이 확보될 수 있는 장소가 되고, 나아가 그의 주인인 영역, 즉 독일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열어젖히는 '공간내기'의 움직임이 된다.
이듬해인 2015년에 제작된 〈어디에도 집은 없다(Nowhere Is Home)〉(2015)는 〈뿌리 뽑힘〉을 통해 다시금 뿌리를 내릴 장소를 찾고자 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뿌리를 내릴 수도 없어 소지품을 싣고 떠나야만 하는 현대 유목민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내 어머니가 독일인임에도 사람들은 항상 나를 시리아인이라 생각한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 이름이 슈테판이나 귄터와 같은 이름처럼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이민자로, 외국인으로, 이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좋아, 떠나보자’라고 생각했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자동차를 채우고 떠났다.
독일인으로서 독일어를 구사함에도 할부니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요소는 시리아인으로서의 모습, 독일의 전형적인 이름과는 다른 이름이다. 이런 환대의 "첫 번째 폭력"으로부터 사이-존재는 스스로 틈을 만들고 틈 사이를 개입하고자 자동차를 타고 곳곳으로 이동한다. 데리다가 주체의 통제가 불가능한 경계적 존재들, 즉 주체를 사로잡는 타자들이 주체를 해체하고 능가하기에 수동적이지 않다고 보았듯 〈어디에도 집은 없다〉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목민의 현실에 굴복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에 맡기고자 하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행동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이래로 독일에 정착한 지 10여 년이 흘렀음에도 그는 영원한 유목민으로 남아있지만, 이는 주체의 이항대립으로서 타자가 아닌 '사이'의 공간을 횡단하는 도래할 타자로서의 유목민이다.
아직 어디에도 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 나는 반 독일인, 반 시리아인이기 때문에 항상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독일인이라 불렸고, 독일에서는 그 반대로 불렸다. 현재 나는 '잡종'으로서 양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다. 국가 정체성 개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나 속한다.
- Atassi Foundation 웹페이지 참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이-존재는 오히려 어디에나 속할 수 있다. 할부니에게 어떤 하나의 절대적 정체성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정체성에 대해 묻지 않는다. 단지 "집이 어디에 있는가"가 관건이다. '집'을 찾는 행위는 유령출몰과도 같이 틈을 열어 공간을 내고자 하는 시도인 동시에 할부니 안에서 지속적으로 대리보충되며 의미와 위치가 뒤바뀌는 주체와 타자 간의 환대 관계를 수행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같은 해, 할부니는 〈도주 중인 작센사람(Sachse auf der Flucht)〉(2015)라는 작업을 선보였다. 〈도주 중인 작센사람〉은 PEGIDA(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극우단체)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드레스덴 거리를 다니며 주민의 참여를 통해 메시지를 드러냈던 작업이다.
난민들은 국가를 떠난 시점부터 보호받기가 어려워진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혼란하던 시기 내전과 나치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노숙자'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면서 '무국적자'가 되었고 그에 따라 인권을 상실하면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천부적 인권은 국가적 토대 위에서 형성될 수 있다. 자국 정부가 없는 민족은 인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기에, 따라서 난민들이 존엄성을 보호받고자 한다면 국가적 공동체 내에 속해야만 한다.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 즉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right to have rights)"는 환대받을 권리와 상통한다. 〈도주 중인 작센사람〉은 환대받을 권리를 얻지 못하는 난민들에 대해 시리아인으로서 PEGIDA에 반대하며 난민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독일인으로서 자국에서 점점 커져가는 외국인 혐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생리학적 반사(reflex) 작용과도 같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의 환대받을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무조건적 환대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신 내부의 한가운데 위치하는 타자를 향한 환대도 열어두는 것이다. 도주차량 작업들이 개인의 소지품을 싣고 안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이방인의 처지를 보여주지만, 이때 그의 '도주'는 결코 차별과 배제로부터 수동적으로 도피하는 행위가 아니다.
2017년 2월, 11월에 드레스덴의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 앞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앞에 설치된 〈모뉴먼트〉는 시리아 내전 중 알레포(Aleppo)에서 저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보호막으로서 실제로 세워진 바리케이드를 재현한 기념비 설치 작품이다.
시리아의 고통을 기억하길 바라는 이 강력한 메시지는 드레스덴과 베를린이라는 전쟁의 극복, 재건의 상징이 되는 장소에 세워지며 희망을 그리고 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독일과 시리아의 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차이'의 문제이지만, 표면적 차이(언어, 피부색 등)를 극복할 만큼 전쟁과 폭력으로부터의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는 할부니의 언급처럼, 〈모뉴먼트〉는 차이의 문제를 제쳐두고 서로가 평화로운 삶으로 전진할 수 있는 방법, 과거의 유럽과 오늘날의 중동 국가가 공동으로 가지는 연결점을 보여주며 환대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과거 드레스덴 시민들이 겪었던 상실과 고통은 현재 드레스덴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내면화되지 않고 목에 걸려 있는 사이-존재의 타자성이라 볼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집어삼켰지만 현재의 삶에서 여전히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도래할 타자성으로 남아 있다. 〈모뉴먼트〉는 그들로 하여금 '삶'이라는 경계 너머에서 틈을 열고 들어오는 타자의 출몰을 목도하게 만들고, 이를 환대하도록 요청한다. 또한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틈을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주체의 자기 동일화를 경험하는 길을 열어준다. 이것이 가능할 때 이방인(난민)에 대한 환대 역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기본법(Grundgesetz für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제 16a 조 1항에서는 정치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망명권(Asylrecht)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국가 공동체 안에서 박해를 받고 기본적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여 국가를 떠나 온 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조항이며 외국인이 다른 국가에 속하기 직전에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본권이다. 이방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환대를 받을 권리와 같다. 그러나 2020년 독일 하나우(Hanau)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과 같이 반난민 정서와 그들을 향한 적대가 점점 커져가고 있으며, 난민에 대해 열린 환대를 하고자 하는 노력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인도주의적인 입장에도 자국민의 목소리와 상충되는 지점으로부터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국가는 난민 수용 정책에 있어 조건적 환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마나프 할부니는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정착한 독일인이기 때문에 내전을 피해 망명 온 난민이나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나 시리아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세계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온전한 주체나 온전한 타자가 될 수 없었다. 독일에 온 지 15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방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명확한 해결점을 찾기 힘든 이방인 환대의 문제 역시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러한 가운데 데리다의 환대의 사유는 타자에 관한 논의에 있어 유의미한 성찰을 제공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를 토대로 마나프 할부니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환대 앞의 조건들과 차이에 구별 짓기보다 관계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아마도 사이-존재의 사유에서 이 같은 관계의 문제는 승패가 없는 끊임없는 줄다리기의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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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tassi Foundation [웹페이지]: https://www.atassifoundation.com/features/working-in-germany
본 글은 "마나프 할부니, 사이-존재의 사유 ①"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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