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상처로 만들어진 비밀
나는 처음 그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비밀은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뒤집어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밀이 밝혀지면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우리의 비밀을 죽을힘을 다해 숨겨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상냥하고 성실한 아빠는 엄마에게 폭력을 가했었고, 엄마는 그동안 그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갈 때 놀다가 문득 스치는 기억이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인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궁금했다. 실제인지 모를 그 기억에서 아빠는 컴컴한 밤에 술에 취한 듯 마당 한가운데 쓰러져 있기도 했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노려 보기도 했다. 엄마의 얼굴은 어두웠고 한쪽 팔에 남아있던 데인 흉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 기억들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엄마에게 물어봤을 때 엄마는 “어려서 꿈꿨던 게 생각나는 거야.”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엄마는 숨기려고 하셨지만, 나는 정확한 진실을 알아야 했다. 평소에 아빠는 말수가 적고, 다른 사람에게 만만하게 보일 만큼 친절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나면 엄마에게 모진 말들을 쏟아내었다. 단순히 술만 마시지 않으면 우리 아빠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 믿음은 점점 증오로 변했다. 오랜 시간 감추려고 했던 비밀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속에서 살금살금 피어올라 나를 괴롭혔다. 성격 좋고 착한 경운기 아빠가 가증스러웠다. 그동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언니는 엄마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면서 공부에 더 힘을 쏟았다. 엉덩이에 검은색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물도 마시지 않고 집중했다. 나는 엄마에게 내 기억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제부터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대로 엄마를 지키고 있었다.
아빠의 폭력은 우리가 어릴 때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폭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마음과 기억 속에 상처로 자리 잡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비밀이 되었다. 아빠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다가와도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무심코 엄마에게 던지는 모진 말들도 분명히 폭력이었다. 그 말들은 아빠의 낮은 자존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많은 형제 중 둘째인 아빠는 항상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할머니는 유난히 아빠를 못마땅해했는데 그 이유는, 제일 능력이 없어서였다. 할머니에게는 아픈 손가락을 더 보듬어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수록 아빠는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고, 생각대로 잘 안될 때마다 술을 마셨다.
간혹 누군가 아빠에게 “참 좋은 사람이야. 참 친절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면 아빠는 그 사람에게 간과 쓸게라도 빼줄 듯 충성했다. 내 친구들이 나에게 “너희 아빠 정말 친절하시다.”라고 하면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로 얼굴이 굳었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빠에 대한 거부감은 더 커졌다.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빠가 너희들 생각하는 건 진심이야. 나는 미워해도 자식들 생각은 한다.”
어쩌면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빠의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라는 말을. 자식들에게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왔던 아빠는 우리에게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애써서 너희들 경운기 태우고 다니는지 아냐?”
꼬일 대로 꼬인 사춘기 내 마음은 이 말을 들을 때면 ‘본인 공치사하고 싶은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아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빠가 자라온 환경과 부모, 형제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에 대해 들었지만, 내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비밀은 아직 상처였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미워도 아빠인데,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비밀이 드러나고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예기치 못한 또 다른 비밀은 갑자기 찾아왔다.
우리가 나이 많은 부모님께 잘해야 된다는 다짐을 하며 언니와 한참 이야기 중이었는데, 언니는 외할머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지 아냐면서 말했다.
“네가 전에 봤던 그 여자, 엄마 딸이야. 그냥 모른척해.”
내가 봤던 그 여자라면, 어느 날 불쑥 찾아와 내 손을 만져보고 홀연히 가버린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외할머니가 신발도 못 신고 뛰어나갈 정도로 꼭 붙잡고 싶어 했던 하얀 얼굴의 그 여자.
또 다른 비밀은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니를 통해 들은 엄마의 삶은 너무 가여웠다. 어릴 때 잘 살던 집안이 망하고 형제 중 장녀인 엄마에게 희생을 강요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결혼까지 반강제로 하게 되었다가 외도한 남편에게 딸아이를 빼앗기고 쫓겨난 엄마. 그 이후 소개로 아빠를 만났지만, 건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아빠는 엄마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왜 이리 삶은 엄마에게 가혹했을까? 이런 삶 속에서도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최선을 다해 지켰고, 아빠의 모습도 이해하면서 보듬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보며 두고 온 딸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셨을 엄마일 텐데,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에 이런 아픔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의 비밀은 각자의 삶에서 받았던 상처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서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이 비밀들로 인해 우리는 좀 더 강해지고 부모님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상처 받은 지난 세월 동안 힘들게 살아온 아빠도 분명히 우리를 사랑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다. 비밀을 처음 마주할 때는 괴로웠지만 점점 그 고통에서 벗어나 아빠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었지만 한 사람으로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했던 모습은 나와도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아빠도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