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교회에 나가셨다. 처음엔 동네에 있는 조그만 교회에 며칠 나가시다가 그 이후 시내에 있는 교회로 예배를 다니셨다. 엄마가 다니시는 교회는 내 친구들도 많이 다니는 곳이었는데, 교인의 수가 200명 정도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회였다. 아빠는 바쁜데 교회까지 다니냐면서 탐탁지 않아 했지만 엄마는 동네에 계신 할머니들과 함께 일요일마다 부지런히 나가셨다. 친구들은 나도 함께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다면서 정성 들여 엽서를 써서 주기도 하고, 교회 행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주말마다 늦잠을 자지 못하고 교회에 나가는 게 싫어서 “고맙지만, 다음부터 나갈게.”라는 말로 넘어갔다.
일요일에 교회를 다녀오신 엄마는 얼굴이 밝았다. 겸사겸사 사람들을 만나고, 외출도 할 수 있어 엄마에게는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좋은 기회였다. 평소에 외출을 잘 못하셔서 변변한 옷도 없고, 들고 다닐 가방도 마땅치 않았던 엄마는 시장에 나가 옷과 가방을 사고 샛노란 도금이 된 시계도 사 오셨다. 보기에도 싸구려 시계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갈 때 허전한 엄마의 손목을 빛내 줄 귀한 손목시계였다.
아빠는 엄마가 교회로 가면 슬며시 시내로 나가 술을 드셨다. 낮 시간에 나간 아빠는 저녁 먹을 시간이 될 때쯤 술에 취해 들어왔다. 술에 잔뜩 취해 엄마에게 한참 시비를 걸다 잠이 들면 나는 아빠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안쓰러움과 분노가 섞인 이중적인 감정이 차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나고 늦가을이 되었을 때 엄마는 스카프를 사 오셨는데, 목에 스카프를 두른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알뜰한 엄마는 겨울에도 이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셨다. 따뜻한 목도리를 하면 좋을 텐데,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엄마는 스카프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셨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바람이 유난히 차가운 날이었는데, 평일이지만 엄마는 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하시고, 공붓벌레 언니는 학원으로 가서 동생과 나만 집에 있었다.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티브이를 보고 있을 때 이장 아저씨가 찾아와 다급하게 아빠를 불렀다.
“자네 있나? 집에 누구 없나?”
“안녕하세요. 아빠는 지금 안 계세요.”
“이거 큰일이네. 너희 엄마가 크게 사고가 났어.”
순간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에 귀가 먹먹해지고 현실이 아닌 듯 어지러웠다.
“동네 다 와서 사고가 났는데, 엄마가 많이 다쳤어.”
나는 동생에게 잠깐만 있으라는 말을 하고 겉옷을 챙겨 아저씨와 함께 뛰어 내려갔다.
동네 입구에서 7분 정도 떨어진 사고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구급차와 경찰차가 뒤섞여 아수라장이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도로 바깥쪽으로 굴러떨어진 봉고차와 도로를 가득 채운 피만 보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쓰러질 듯 서 있던 내 눈에 시계가 보였다. 샛노란 엄마의 도금 시계는 사고 시간 2시 10분에 멈춰 있었고 깨진 유리 틈으로 끈적한 검붉은 피가 스며있었다.
“얘야, 만지면 안 돼.”
주변에 있던 경찰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우리 엄마 거예요. 우리 엄마 시계. 우리 엄마.”
경찰은 우는 나를 달래며 엄마는 병원으로 가셨다고 하면서 시계는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 울고 있는 언니를 보았다. 언니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동네 어른들에게 사고 이야기를 듣고 집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아빠는 시내에서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을 다녀오신 후 사고 수습을 위해 밤새 들어오지 않으셨다. 우리는 아빠가 병원에서 가져온 엄마의 피 묻은 스카프와 병원 가위로 갈기갈기 찢긴 블라우스를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
사고를 당한 다섯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엄마 한 명이었고 갑자기 네 명의 생명을 한꺼번에 잃게 된 우리 동네는 모두가 초상집처럼 우울했다. 엄마는 수술 후 두 달간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집안의 살림은 내가 맡기로 했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언니에게는 공부에만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했고, 동생에게는 얌전하게 잘 지내라고 당부했다.
아빠는 돈이 없어서 합의를 못한다는 가해자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큰 외삼촌이 나서서 700만 원의 합의금을 받게 되었다. 그 돈은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고스란히 아빠의 술값이 되었다.
매일 술 취한 채 경운기를 운전하고, 그러다가 가끔은 도랑으로 빠져 얼굴이 찢겨 오기도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외삼촌은 “나는 너희 아빠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몇 년 동안 아빠를 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빠가 미치도록 밉고, 싫었지만 그런 감정에만 빠져있을 수 없었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생활하고, 긍정적으로 지내야 했다. 나는 평소보다 2시간 일찍 일어나 언니의 도시락 2개와 동생과 내 도시락을 1개씩 준비하고 아침식사 설거지까지 하고 등교했다. 저녁이면 그날그날 빨래와 청소를 하고 공부하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언니를 마중 나갔다. 언니는 항상 나에게 미안해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언니에게 전교 1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은근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 세탁기가 얼어 찬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행복하고 뿌듯했고,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한 일이었기에 힘들어도 즐거웠다.
긴 병원생활을 마치고 오신 엄마의 이마와 얼굴엔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다. 엄마는 집에 오시자마자 손빨래로 다 터져버린 내 손을 보고는 어린아이처럼 우셨다. 그리고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빠에 대한 원망에 화병이 나서 한참을 힘들어하셨다. 나는 아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인정보다는 포기를 했던 것 같다. 이상하게 더 이상 밉지 않고 원망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가족 안에 있지 못하고 점점 더 겉돌고 있는 아빠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유난히 힘들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에서 여름으로 바뀔 때 우리는 정말 단단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의 시간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듯 어둠 속을 지나온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