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랑꽃 Feb 26. 2021

소중한 모든 것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한 거예요

“띵! 띵! 띵!”

새벽 1시 44분. 연달아 귀를 울리는 메시지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확인한다. 조용한 새벽을 깨우는 신경질적인 소리에 눈을 뜨긴 했지만, 눈앞이 침침하다.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내 두 눈이 갑자기 치고 들오는 핸드폰 불빛에 놀라 경기를 일으키듯 파르르 떨렸다. 연신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두 손으로 눈두덩을 살짝 눌러주니 그제야 눈이 안심하고 제 할 일을 한다.


“이게 뭐야?”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확인한 핸드폰 화면 속에는 흰색과 자주색이 얼룩진 꽃 사진 2장이 있다. 사진 바로 아래에는 ‘5년 만에 꽃 핌’이란 짧은 설명도 있다. 바로 연달아 오는 문자에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섞여있었다.

‘사랑과 정성!’

미국에서 11100km 넘는 거리를 지나 숨 가쁘게 달려온 언니의 문자였다.

‘미안, 잘 자라!’

사실, 언니의 이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5년 만에 핀 귀한 꽃 사진을 보낸 이상 언니는 이 꽃이 피기까지의 역사를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발 빠르게 답했다.

‘피우기 어려운 꽃인가 보네.’

아니나 다를까,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신나게 대답해 준다. 

‘흔하고 싼 거야, 서양란. 선물 받았을 때는 진한 보라색 꽃이었는데, 자주 얼룩 꽃이 피었어. 이게 뭐지 싶다. 아마 두 그루였나 봐.’


까마득하게 먼 거리를 뚫고 온 문자 속에 언니가 보인다. 문자를 보낼 때 언니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신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앉고 있던 의자를 살짝 앞으로 당긴 다음, 핸드폰 자판을 톡톡 누르다 오타를 치게 되면 ‘에잇!’ 짧은 짜증도 냈을 것이다. 같은 나라 하늘 아래가 아니어도 언니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인다. 예전에 엄마가 언니 태몽으로 부잣집 장롱에서 구슬 두 개를 훔쳐 나오는 꿈을 꿨다고 하셨다. 엄마는 꿈에 나왔던 구슬이 연년생인 언니와 나라고 신기해하셨는데, 그 구슬 두 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연결이 되어있는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습이 예상된다.


새벽 2시가 되어가는 시간. 언니의 꽃 이야기는 슬슬 마무리되고 있다.

‘깨워서 미안! 어서 자라. 난 눈 치우러 나가보려고.’

드디어, 자도 된다는 언니의 기분 좋은 허락이 떨어졌다. 이날 미시간주에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양란 꽃을 넘어 아이들 이야기를 거치고, 미국의 마켓과 호수 이야기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 이야기로 마무리해야 끝이 났을 것이다. 다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분명히 기분 좋게 문자를 나눴는데 가슴 한쪽이 허전하다. 언니가 곁에 있을 때 내가 더 잘해 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 사실 6년 전 언니 가족이 미국으로 간 직후부터 후회했다. 결혼 이후 언니와 둘만의 편한 시간을 가져 본일도 없고, 같이 여행을 가본 적도 없다. 조금 더 자주 연락했어야 하는데, 조금 더 자주 만났어야 하는데,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는데, 항상 바쁘고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기 힘들다는 흔해 빠진 이유로 무관심을 합리화했다. 내 곁에 언니가 언제나 그대로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언니가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5년 전에 알게 되었다. 그동안 연년생 언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120km 떨어져 있을 때 몰랐던 사실을 11100km나 멀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는 게 씁쓸했다.


마흔다섯이란 나이도 아직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자부하기엔 부족한 나이인듯하다. 머릿속으론 알고 있지만 미처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과 알면서도 여러 가지 핑계로 미루는 것들이 많다. 왜 항상 곁에 있을 때 소중함을 모르고, 멀어지고 없어진 후에 후회할까? 어쩌면 자식에게 모든 걸 주고도 항상 미안한 부모의 마음처럼, 그 순간 최선을 다했어도 사람이기에 아쉬움과 후회는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헤어짐의 순간이 왔을 때 조금이나마 후회되는 마음이 연해 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이름 모를 고양이들과 길가에 핀 꽃들까지. 내 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새벽시간 잠을 줄이며 언니와 문자를 나누는 이 순간도 언젠가는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언니와 11100km 보다 더 멀어지기 전에, 잘해주지 못했던 과거의 순간을 후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아끼고 사랑하고 싶다. 이제는 내 곁에 가까이 있을 때 소중한 줄 몰랐던 것들이 멀어지고 사라지면, 그제야 후회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잃어버리고 멀어지고 나서야 왜 그랬을까 아쉬워하지 않기를. 당연한 것은 없기에 작은 것 하나도 아끼고 사랑하기를. 5년 만에 꽃피운 흔하고 싼 서양란 사진을 소중하게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하며 다짐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수는 새로운 도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