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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Mar 03. 2021

동그라미와 네모의 전쟁

예민함도 다양한 특성 중 하나

“도이 씨 청소하세요?”

주말 아침,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며 능글맞게 웃는다. 재작년인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선생님께서 ‘엄마’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셨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엄마, 우리나라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대요. 본인 이름을 불러주기보다 자녀의 이름을 붙여서 ooo엄마라고 한다는 거죠. 엄마는 절대 이름 잃어버리지 않게 제가 자주 불러드릴게요.”


그때부터 선생님의 의도를 교묘하게 악용한 녀석의 너스레 공격이 시작되었다. 본인이 심심하거나 아쉬울 때면 싱글싱글 웃어가며 “우리 도이 씨”를 외쳤다. 나는 짓궂은 아들의 능글거림에 눈을 흘기다가도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아들의 이런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항상 예민한 아이였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어린 아들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가끔, 내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상처받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열병이 나기도 했다. 내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눈치껏 상황에 맞추어 사람들과 적절하게 섞여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아들은 언제나 뾰족뾰족 날이 서있고, 작은 것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가 커갈 수 있는 완벽하고 성공적인 육아를 꿈꿨는데, 아들은 내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특히, 나는 아들의 예민한 그 뾰족함이 부담스러웠다. 본인이 이해되지 않으면 한마디 한마디에 도전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아들이 차가운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쟁을 선포하겠다 휴먼!” 

아들은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후 담임선생님과 첫 면담이 있었다. 선생님은 40대 중반, 작은 키에 깐깐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첫 면담이 긴장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내게 선생님은 궁금한 점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해도 된다면서 빙그레 웃으셨다. 나는 걱정스럽게 아들의 성격과 행동을 이야기하며 날마다 치르는 전쟁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네, 현우는 예민한 성격 맞아요 어머니.”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께 다시 한번 확인받게 된 내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예민하다’는 마치 ‘성격이 좋지 않다’라는 말로 들렸다. 선생님은 구겨진 내 얼굴을 보고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어머니가 아주 잘못 생각하고 계세요. 예민한 건 나쁜 게 아니에요. 잘못된 것도 아니고요. 현우는 예민하기보다 섬세하고 정확한 아이예요. 그래서 말 한마디에 상처받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해요. 쉽게 말하면, 현우는 네모예요. 네모는 사각이 일정하고 반듯하죠. 하지만 어머니는 동그라미를 강요하시잖아요. 현우가 동그라미가 되려면 얼마나 아프게 사각을 깎아내고 피를 흘려야 되는지 아세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내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유 없는 예민함은 없습니다 어머니. 현우가 어떤 특성을 가진 아이인지 잘 생각해 보세요. 네모가 나쁜가요? 세상은 다양한 특성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나쁘다 좋다를 누가 결정하나요? “


그날,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을 보니, 녀석은 정말 네모였다. 내가 낳아 8년을 키웠는데 이제야 알다니.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들의 특성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만 강요했으니 아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본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엄마에게 예민함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내 방식대로의 완벽한 육아라는 교만한 계획은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 아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찰떡같은 동그라미와 네모 비유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아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지금도 네모가 동그라미로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상황에 따라 네모가 되어야 할지 동그라미가 되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아이는 스스로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도형이 되었다. 


우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때론 자신의 기준과 기대치에 맞추어 아이를 억압하기도 한다. 엄마라고 해서 내 기준과 생각이 모두 옳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특성과 개성이 있다. 아이가 네모여도 괜찮고, 별 모양이라도 괜찮다. 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아름다운 도형이기 때문이다. 

능글맞게 “도이 씨”를 외치는 아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 순간 아들은 어떤 도형의 모습일까? 어떤 도형이든 분명히 개성 있고 독특한 아름다운 도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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