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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Mar 30. 2021

벼락 맞은 여자

이제 복권 1등, 돈벼락만 남은 건가?

MBC 방송 ‘신기한 TV 서프라이즈’ 재방송인 것 같다. 최근 방송은 아니고 좀 시간이 지난 회차였는데, 운이 없는 한 외국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남자는 살아생전 세 번의 벼락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월터 서머 포드란 사람이었다. 그가 사망하고 4년 뒤, 묘지에까지 벼락이 떨어져 묘비와 유골이 산산조각 났다고 한다. 정말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죽어서까지 벼락을 맞은 불운한 사나이의 이야기는 정말 놀랍고 안쓰러웠다.


세 번은 아니지만, 나도 벼락을 맞은 사람이다. 대학교 1학년 시험 기간이었는데 첫 차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내렸고, 사방이 어두웠다. 버스 정류장에서 첫 차가 나를 태우기 위해 속도를 줄일 때쯤 내가 쓰고 있던 우산을 접으려고 준비하는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우산을 들고 있던 내 오른쪽 팔에 강하게 ‘찌릿’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뭐지?’하는 짧은 생각을 하고 우산을 접어 무심하게 툭툭 털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요금통에 지폐 두 장을 집어넣고 거스름돈을 기다리는데, 기사 아저씨는 귀신에 홀린 듯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저씨, 800원 주셔야 하는데요.”

내 말에 기사는 “아…네.” 대답을 하고는 거스름돈을 내어주었다. 뒤돌아 빈자리에 앉기 위해 내부를 휙 둘러보니 승객은 5명. 새벽 첫 차를 탄 승객 전원 5명의 얼굴은 달걀귀신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특히 두 명의 외국인 근로자는 쌍꺼풀진 큰 눈동자로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입을 벌리고 나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뭐야, 매너 없이.’

언짢은 마음을 뒤로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펴서 읽으려고 하는데, 회사원인 듯한 아가씨가 걱정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아까, 벼락 맞으셨는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제가요? 제가 벼락 맞았어요?”

놀라서 되묻는 내 말에 한쪽에 떨어져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어머, 벼락 맞고 어쩜 그리 멀쩡할꼬?”


그랬다. 오른팔에 느껴지던 찌릿한 느낌은 벼락 때문이었다. 그제야 놀란 눈으로 계속 나를 쳐다보았던 외국인들이 이해되었다. 

“우산으로 하얗게 벼락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멀쩡하게 버스에 타니까, 너무 놀랐죠.”

아가씨는 연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오른쪽 팔만 좀 찌릿했어요. 팔을 통과했나 봐요. 벼락은 생각도 못 했네요.”

“괜찮은 것 같아도 오늘 병원에 꼭 가봐요.”


그 당시에는 내가 무슨 대역 죄를 지었기에 벼락을 맞았나 싶었다. 보통 나쁜 짓을 하면 ‘벼락 맞을 X’이란 화끈한 욕을 듣는다. 내가 벼락 맞은 경험을 이야기하면 모두 속으로 “정말 이상한 짓 많이 했나 보네.’란 생각을 할까 두려워 스무 살의 나는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벼락이 우산으로 떨어지고 난 후, 2주 동안 팔이 저렸다. 참 애매한 아픔이었다. 외관상 아무 이상도 없었고, 가끔 잠깐씩 저린 느낌이 들 뿐이었다. 2주 정도가 지나자 그 느낌도 사라졌고 점점 벼락을 맞았다는 사실도 잊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유 없이 창피하기만 했던 벼락 사건은 이제 인생의 힘든 고비가 생길 때마다 나에게 위안이 되는 고마운 사건이 되었다. 너무 힘들어 앞이 캄캄할 때 나는 항상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벼락 맞고도 산 여자야! 난 뭘 해도 잘 될 거야!’

이 한마디면 없던 힘도 솟아나고, 걱정스럽던 앞날이 화창해지는 느낌이다. 가끔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 벼락 사건을 말하면 다들 놀라워하며 즐거워한다. 나의 벼락 사건을 계기로 각자 자신들이 겪었던 기이한 경험이나 놀라웠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기도 한다. 간증하듯 한 사람 한 사람 생각지도 못한 경험들을 풀어놓을 때, 누군가 말했다.

“벼락 맞고도 살았는데, 로또 당첨 아니야?”

“에이. 그래도 로또 1등 당첨이 더 어려울걸?”


가만있어 보자. 나는 정말 벼락을 맞고도 살아있다.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거나 계산 능력이 사라지기도 하고, 신체에 큰 화상이나 상처를 입기도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멀쩡하다. 머릿속으로 터무니없는 계산이 이어진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8,145,060분의 1. 

벼락 맞고 살았다고 그 정도 확률을 이길순 없을 것 같고… 

일단, 벼락을 맞고 팔다리가 떨어지거나 다치지 않았고, 기억력과 계산력 모두 정상이면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그래도 확률 1,357,510분에 1인 로또 2등 정도에 이미 당첨된 게 아닐까?’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계산을 머릿속으로 끝내고 나니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혹시 2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벼락의 후유증이 나타나는 걸까? 8,145,060이란 까마득한 숫자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제 복권 1등 돈벼락만 남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경험상 어차피 인생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은 것 같으니 모르는 일 아니겠나 싶다. 몇 년 전 3등에 당첨된 경험도 있다. 이왕이면 ‘안된다’ 보다 ‘된다’라는 생각이 좋지 않을까? 웃음 터지도록 터무니없는 계산으로 만들어진 상상이지만 하루를 즐겁고 희망차게 보내기엔 충분한 것 같다. 아, 맞다! 제일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일단 복권을 사야지. 그리고 다시 나름 철저하게 계산한 엉뚱한 상상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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