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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Mar 31. 2021

공감성 수치, 감정 소모의 끝판 왕

왜 모든 창피함은 나의 몫이어야 하는가?

참 창피하다. 티브이 드라마 주인공이 실수하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더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옆에 있는 딸아이는 이미 드라마에 집중한 상태. 나는 슬며시 리모컨을 가져가 채널 버튼을 누르며 말한다.

“다른 거 봐도 될까?”

“에이, 이미 채널 넘기고 말하는 게 어디 있어요?”

드라마 주인공이 곤란함을 겪기 전에 내가 먼저 채널을 바꿔야 한다는 조급함에 딸에게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이미 버튼을 눌러버렸다. 딸은 볼멘소리를 하며 입이 삐죽 나와있다.

“미안, 미안. 그런데, 나는 진짜 못 보겠다.”

“에효, 어차피 한 두 번도 아닌데요 뭘.”

딸아이는 반 포기 상태로 나를 위해 가볍게 볼 수 있는 채널을 열심히 찾았다.

“무한도전 보실래요?”

내가 즐겨봤던 프로그램을 찾아낸 딸이 물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딸의 눈치가 보였지만, 창피함과 민망함에 불편했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한참 재미있게 깔깔 웃으며 프로그램을 보는데, 아까 봤던 드라마 주인공의 안위가 궁금하다. 분명히 보기 힘들 만큼 민망하고, 창피해서 채널을 바꿨는데, 민망한 상황 이후가 궁금해 미치겠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누구요?”

“아까 보던 드라마 여주인공 말이야.”

“아니, 엄마. 이럴 거면 그냥 드라마 보면 되지, 왜 채널을 돌려요?”

딸아, 답답하지? 나도 답답해. 병이다. 이 정도면 정말 병이 틀림없다.


곤란함을 겪는 티브이 속 인물을 보면 마치 내가 그 사람인 듯 더 이상 그 상황을 보지 못하겠다. 운동 경기를 시청할 때도 그렇다. 한일전 축구라도 하면 후반전 중반부터는 보지 못한다. 멀찍이 떨어져 경기를 중계하는 소리만 듣는다. 아슬아슬한 경기를 치르는 그 모습을 보기 힘들어서 그렇다. 지금까지 현실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거나 눈을 감고 피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왜 티브이 속 인물에게 과하게 감정 이입을 해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답을 몰라 답답할 때는 역시 초록 검색창에게 도움을 청한다.

검색창에 ‘드라마 볼 때 창피해서 채널 돌리기’를 검색하자 ‘공감성 수치’란 단어가 보인다. 다시 검색창에 ‘공감성 수치’를 검색하니 내가 겪고 있는 증상에 대해 나와 있었다.


<공감성 수치 >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해당 배역이 곤란한 일이나 창피를 당하는 장면을 볼 때 자신 역시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이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증상을 말한다. [시사상식사전]


와! 병명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어쨌든 증상에 대한 명칭이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공감성 수치와 비슷한 현상을 타인을 보고만 있어도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뇌신경 세포가 작동하는 ‘거울 뉴런’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검색 페이지 아래로 공감성 수치를 해결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성 수치가 심해서 괴롭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놓았다. 짠한 마음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안심도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공감’이라는 건 살면서 꼭 필요한 장점이지만, 적절한 선을 넘을 넘게 되면 괴로움이 된다.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못하니 불필요한 에너지와 감정 소모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진다. 곁에 있는 가족들도 자유로운 티브이 시청 권한을 나에게 빼앗기니 피해를 보고 있는 게 맞다.

검색을 통해 받은 해결 방법은 ‘선 지키기’다. 티브이 속 인물과 선을 긋고 마음속으로 ‘저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라고 나와있었다. 실천을 하기 위해 일부러 손발이 오글 거리는 드라마를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저히 못 보겠다. 채널을 돌리기 전에 속으로 외쳤다.

‘눈에 힘줘! 절대 시선을 돌리지 마!’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계속 생각한다.

‘현실이 아니야. 드라마야. 수많은 카메라고 찍고 있는 드라마. 감독과 작가가 있고, 분장사, 동시 녹음팀과 반사판을 든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드라마야.’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민망한 장면이 끝나고 새로운 장면이다. 이만하면 성공인가 했는데, 30분 동안 본 드라마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으로는 보고 있었지만, 내 머리와 입은 ‘현실이 아니야’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초록 창의 도움을 받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단, 감정 소모로 힘들지 않기 위해 당분간 예능 프로그램 외에 티브이 시청을 자제하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 어떤 일이든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생길 줄 알았는데, 모든 일에 어설프다.


공감성 수치 덕분에 ‘아기자기 한 멜로드라마 한 편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기’ 목표가 생겼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지치지도 늙지도 않는다는 취지의 명언을 들은 적이 있는데, 목표 덕분에 덜 늙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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