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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Apr 04. 2022

살은 빠졌는데 욕이 늘었다(2)

마음의 상처도 빠지기를

여자는 부천 지하상가에 늘어선 많은 옷가게 중 주로 청바지와 티를 판매하는 가게의 점원이었다. 내가 가방을 메고 옷가게로 들어섰을 때부터 여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짝! 짝!' 짧은소리로 껌을 소리 내서 씹고 있었다. 그 시절 21살 학생이었던 나에게 청바지는 참 소중한 옷이었다. 특히 부천 지하상가에 갔던 그날은, 열심히 관리를 해본다고 점심까지 굶어가며 70킬로대로 몸무게를 줄인 첫날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쇼핑을 다닌 날이었다. 


가만히 옷을 살펴보는 내 귓가에 소름 돕도록 거슬리는 '짝! 짝!' 껌 씹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여자가 바싹 다가와 내가 살펴보던 청바지를 툭툭 털면서 말했다.


"언니가 입을 옷은 여기에 없는데~"


20대 후반은 돼 보이던 여자는 21살 나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써가며 입을 옷이 없다면서 씰룩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치스러웠다. 단지 살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지금 같았으면 "이 여자야! 당신 말이야? 방귀야?"라고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그 시절 21살의 나는 마치 내 몸 자체가 민폐이고 죄인양 급하게 가게를 나왔다. 여자는 돌아 나오는 내 뒤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참..내.. 아니 당연히 맞는 게 없지.. 눈도 없나!"



감히 뚱뚱한 네가 주제도 모르고 들어와 옷을 사려고 하냐는 빈정거림이었다. 여자의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몇 달 동안은 다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화가 나 그 여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흔드는 상상을 했다. 그러고는 항상 "나쁜 X"이라는 말로 상상을 마무리했다. 


그날의 경험 이후로 내가 아닌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그런 경험을 이야기할 때 또는 TV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다양한 욕이 나왔다. 마치 내 일인 양 화가 나고 답답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날씬해지면 다 잊어버리게 된다고. 그런데 사람들의 그 말은 틀린 것 같았다. 분명히 살은 빠지고 건강해졌는데 마음속 그 상처는 없어지지 않았다. 


옷가게 점원 그 여자의 모습은 고등학교 시절 체육복을 갈아입기 위해 내 교복 치마를 빌려 입었던 그 아이와 닮아있었다. 그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 온 일명 잘 나가는 그 시절 날라리였는데 내 교복 치마를 입고는 "야~ 이것 봐! 허리에 내 주먹이 왔다 갔다 한다!" 라면서 내 치마를 자기 허리에서 빙빙 돌려가며 치마 앞쪽으로 주먹을 넣었다 뺐다 했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깔깔거렸다. 그 친구는 자기 허리에 큰 내 치마를, 아니 뚱뚱한 나를 비웃고 있었다. 부천 지하상가의 청바지 가게에서 아무 말 못 하고 나왔던 나는 그 점원의 씰룩거리며 웃는 얼굴에서 고등학교 시절 그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어쩜 그리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나이가 들어가며 가끔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무렇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직도 그 억울함과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에 욱 하고 감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 여자는 청바지 많이 팔아서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나?라는 유치한 생각도 해봤다.


30대 중후반쯤 인가... 언젠가 동창들을 만났을 때였다. 친구들은 참 많이 변해있었다. 나도 물론 건강하게 변했다. 모두 하나같이 나에게 "와 몰라 보겠다!"라고 말했다. 자리에 가깝게 앉은 친구들하고만 연신 수다를 떨다가 돌아온 날, 나는 내 교복 치마를 돌려가며 나를 놀렸던 그 친구를 보았다. 몰라볼 정도로 변한 그 친구의 모습에 놀랐지만 따로 인사하지는 않았다. 

"OO이는 결혼해서 시험관 시술 때문에 살도 찌고 몸이 안 좋아졌대."란 말만 전해 들었다.

맛있는 거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것 봐라~' 하면서 고소했을까? 그냥 좀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본인이 나에게 했던 그 일을 기억 못 한 채 나만의 기억일 수도 있다. 이제는 나도 감정이 조금씩 무뎌지는 걸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쩌면 너무 큰 행복일지도 모른다. 


이제 벌써 40대 중반이다.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건 가끔 나오는 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억울함이 내 억울함 같다. TV나 인터넷 뉴스가 마치 내 욕을 기다리듯 연일 억울한 일들을 쏟아내고 있다. 오늘도 인터넷 뉴스를 보며 한 마디 했다.

"이런.. 우이 씨..."

엄마가 나쁜 말 하지 말라며 키우셨는데, 죄송스럽다.

한편으론 이정도는 정의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

아직은 갈길이 멀지만 40대를 지나 50대에는 지금보다는 성숙한 우아한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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