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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Apr 12. 2022

마흔여섯 살 VS 그냥 여섯 살

미운 46살, 예쁜 6살


눈이 시리다. 불편한 눈을 비비고 나니 눈앞이 더 흐릿하다. 마흔여섯 살에 맞이 한 노안. 처음에는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일정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코 앞으로 다가 올 수록 사물이 흐릿해지는 걸 경험하고 나니 더 이상 우길 수가 없다. 안구건조증까지 겹쳐진 눈은 바람이 조금만 불면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뭐, 가끔은 아름다운 봄날의 감동에 젖어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는 척 하기는 좋다. 


저녁시간 TV 예능프로그램 화면에 흐르는 자막이 어지럽다. 괜히 심술이 난다.

"아니, 읽기도 전에 저렇게 빨리 지나가..."

심술스럽게 옹알거리는 내 말에 여섯 살 쌍둥이 녀석들이 꼬리를 연신 흔들어댄다. 입까지 살짝 벌리고 쳐다보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언가를 냉큼 핥는다.

"안돼! 안돼! 얼른 에퉤퉤해! 지지야!"

급한 마음에 녀석의 입을 벌리고 그 무언가를 찾아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여섯 살의 시력은 마흔여섯 살과는 다르다. 사실, 마흔여섯 살과 그냥 여섯 살의 차이는 시력만이 아니다.



마흔여섯 살의 나, 그냥 서운하다. 남편이 내 말의 의미를 잘 몰라줄 때도, 기숙사에 있는 아들이 카톡으로만 찔끔찔끔 연락할 때도, 하다못해 내 반찬 남기지 않고 젓가락질 한 번에 몇 개씩 가져갈 때도... 세상에 이런 좁쌀이 없다. 그런데 여섯 살은 세상 해맑다. 우리끼리 음식을 먹으며 "너희들은 못 먹는 거야."란 소리에도 서운해하지도 않고 얌전하게 기다린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꼬리를 흔들고 엉덩이까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서운하다는 티를 내지 않는다. 


마흔여섯 살의 나는 웬만하면 다 귀찮다. 이제 20대 30대 시절의 체력을 못 따라가기도 하지만 점점 게을러지는 것 같다. 산책 시작 30분이 지나면 이제 조금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야지 생각한다. 여섯 살은 산책 시작 30분 후부터 진정한 산책이 시작된다. 처음 30분은 예열시간이다. 바람과 흙, 풀냄새에 흥분된 여섯 살은 더운 날 숨을 헐떡이면서 앞으로 전진한다. 세상의 모든 냄새를 콧속에 넣어 가겠다는 듯이 비장하다. 집에 도착한 마흔여섯 살은 "아이고, 나 죽겠다!" 벌렁 누워 버리지만 여섯 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거실을 뛰어다닌다.



마흔여섯 나는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사람들을 무한 신뢰하지도 않는다. 상대방, 특히 남편이 과거에 나에게 준 상처를 기억하고 곱씹었다가 어느 순간 터트리기도 한다. 남편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의 상처가 우선이다. 참 치사하고 옹졸하다. 그런데 우리 집 여섯 살은 마음속에 치사함과 옹졸함을 지우는 전용 지우개가 있는 것 같다. 실수로 발을 밟혀 "깽~" 소리를 냈다가도 미안해하는 나에게 안긴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의 발을 살펴보는 내 얼굴을 핥아준다. 너 때문에 내가 아팠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마흔여섯 살 나는 불만이 많다. 현재 내 모습도,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자꾸 더 나아져야 한다고 강요하고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아있다. 나 스스로의 불만은 어느새 습관적인 잔소리가 되었다. 하지만 내 옆의 여섯 살은 잔소리하지 않는다. 특별한 욕심이나 불만이 있지도 않다. 그저 가족이 모두 모여 있을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새로운 장난감을 요구하지도, 예쁜 옷을 사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사랑해"란 말과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면 눈을 가늘게 뜨고 해맑게 웃을 뿐이다. 



이렇게 보니 마흔여섯 살 참 못났다. 

사랑의 의미를, 신뢰의 의미를, 그리고 믿음의 실천을 여섯 살이 더 잘 해내고 있다. 보는 눈에 노안이 왔다고 마음의 눈까지 흐릿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여섯 살을 잘 살펴보면서 배워보고 싶다. 


"헥! 헥!"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신이 난 녀석들이 거실 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엉덩이를 든 채 바닥을 툭툭 건드린다. 어서 같이 놀자는 뜻이다. 이 순간만큼은 마흔여섯 살도 여섯 살과 같이 해맑아질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여섯 살...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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