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받을 권리
준 공기업인 OO의 사원사택 담당자인 그녀와 최후의 문자를 나눴다. 사과받기 위한 자리인데 이 자리를 피해자인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내내 불쾌하고 기분이 상한다. 왜 피해자가 동동거리며 사과하라고 징징거려야 하고 구걸하듯 해야 하나 불쾌감에 불쾌감이 더해진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기 일주일 전이니까, 벌써 3주가 되어간다. 3주 전 어느 저녁시간 딸아이의 놀란 외침이 들렸다.
"엄마! 아빠! 바닥에 물이 엄청 흘렀어요!"
딸아이의 말을 듣고 부엌 싱크대 아래쪽 바닥을 확인하니 조금 전에는 없었던 물이 가득 차 냉장고 아래까지 적시고 있었다. 도대체 바닥에 물이 왜 고였을까... 우리 집 배수관이 터졌나?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스치고 있는데 남편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아... 여기에서 세고 있네."
확인해 보니 가스레인지가 있는 벽 쪽 위 어딘가에서 물이 나오면서 가스레인지 호스를 타고 싱크대 안까지 적시고 있었다. 잠깐의 사이 물은 호스 3분의 1만큼 틀어놓은 듯한 양으로 줄줄 새어 나오면서 바닥 장판은 고인 물의 힘으로 붕 뜨기 시작했다.
급하게 대야를 가져다 물을 받고 수건을 꺼내 여기저기 깔아 물을 흡수시켰다. 물은 갈색이고 쇠가 부식한 냄새 비슷한 좋지 않은 냄새까지 풍겼다.
그날 밤 남편은 잠도 못 자고 가득 찬 물을 버리고 다시 받아내고를 반복하면서 밤을 새웠다. 아파트 관리소장과 이야기를 해야 했기에 당연히 연차를 쓰고 출근도 할 수 없었다.
오전 9시 관리소장의 출근 시간에 맞춰 상황을 이야기하니 바로 기사님과 함께 방문했다. 상황을 본 관리기 사는 위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꼭대기 층부터 살펴보겠다는 말을 하고는 사진 몇 장을 찍어 돌아갔다.
우리 집 바로 위층부터 마지막층까지는 준 공기업인 00의 사택이다. 큰 기업의 사택이니 사고 처리는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관리기사의 연락이 왔다.
"찾아보니 11층에서 보일러가 터져서 아주 난리가 났더라고요. 회사에도 상황 이야기 하고 사모님 댁 피해 사진도 보내고, 사장님 번호도 남겼으니까 연락 올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나마 아파트 기사님의 발 빠른 대처로 물샘 사고는 만 하루 만에 그쳤다. 하지만 밤새서 깨끗하지도 않은 물을 받아내고, 출근도 못한 채 바닥과, 벽과 싱크대 일부분까지 젖어 버렸다. 적어도 3일 내에는 연락이 올 거라는 내 생각을 비웃듯 사택담당자는 고요했다.
3일 차가 되자 젖었던 시트지 끝쪽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젖었던 장판도 두더지가 뚫고 들어간 듯 불룩하게 들뜨기 시작했다. 갈색물이 들어갔던 싱크대도 한쪽은 갈색 얼룩이 지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들뜬 장판 위로 책을 쌓아 눌러 놓고 시트지는 전용 접착제를 발라 다시 곱게 붙여놓았다. 그리고 싱크대의 얼룩을 바이러스 예방 물티슈와 수건으로 닦고 드라이기로 최대한 바싹 말려 놓고, 싱크대의 퀴퀴한 냄새는 하루에 두 번씩 탈취제를 뿌리면서 해결했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도 일 년에 성과급을 화끈하게 지급한다는 준 공기업 OO은 아무런 연락도,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 사이 남편이 손가락을 다쳐 입원을 하게 되고 정신없이 또 일주일이 지났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독기가 올라왔다.
사고가 난 지 거의 3주가 되었을 때, 관리소장에게 기업 사택 담당자의 연락처를 받았다.
"지금까지 연락이 안 왔어요? 이상하네. 사모님 댁 사진이랑 연락처 다 알려줬는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편이 담당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답이 없단다.
하루해가 다 지나갈 무렵 내 핸드폰이 울렸다.
"저 OO 사택담당자인데요."
잘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다 죽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제가 연락처 받았는데 너무 바빠서 연락 못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무리 바빠도 3일도 아니고 3주 만에 목소리를 듣다니. 그것도 피해자가 먼저 연락을 해서.
"저희도 바빠요. 본인만 바쁜 거 아니에요."
"..."
"어쩌면 3주 동안 전화도 한 통 없어요? 피해보상은 둘째고 일단 직접 사과하시는 게 당연한 건데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 죄송합니다."
"피해보상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싱크대를 바꾸거나, 장판, 벽지 바꿀 정도면 바꿔드리는데 만약 바꿀정도가 아니면 따로 회사에서 개인에게 보상하는 건 없어요."
기가 막힌다.
꼭 물건을 바꿔야만 보상을 해줄 수 있고 잠도 못 자고, 출근도 못하고, 장판 말리느라 비싼 가스비 생각 할 수도 없이 보일러를 돌렸는데 보상을 못한다니.
"아~ 그럼 어쨌든 바꿔야 되겠네요? 그럼 싱크대를 젖었던 부분만 잘라서 바꿀 순 없으니 전체 다 바꿔주시고 장판하고 젖었던 벽면 벽지 바꿔주세요. 저야 바꿔준다는데 좋죠."
"아... 저... 그건..."
핸드폰 너머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참 애매했다. 피해상황이.
장판은 바꿔달라고 할 만큼은 맞는데 그걸 위해 냉장고를 들어내고 어쩌고 하는 게 귀찮을 것 같았고 싱크대 나무속은 어떤지 몰라도 일단 말리고 닦고 뿌리고 애를 써 놨더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는 억지 부리지 말고 찾아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가스비에 보태라고 20만 원이라도 주면 넘어가려고 했다.
아니, 20만원도 필요없다.
빵 한쪽이라도 들고 와서 "많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만 했으면 됐을 텐데 보상은커녕 3주라는 긴 시간 동안 연락도 없어 사과도 받을 수 없었던 나는 이미 폭발직전이었다.
보상은 둘째다. 그동안 받지 못한 사과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 바꿔달라니 두 번째 죄송하다는 소리가 나온다.
"담당자님! 착각하지 마세요. 저희 집은 그쪽 회사 사택이 아니고 일반 입주민이에요."
내 뾰족한 말에 기어어들어가듯 죄송합니다를 연발한다.
다음날, 독서 모임 중 전화가 왔다.
사택 담당자인 그녀였다.
본인 회사와 연계된 인테리어 업자와 집으로 방문해도 되겠냐고 한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3주 지난 다음에 오시겠다는 건가요? 이미 제가 다 닦고 붙이고 말리고 했는데 깨끗한 모습 보러 오시는 건가요?"
"..."
"저도 억지 부리면서 진작 다 바꿔달라고 할 수 있었어요. 아무리 바꿀 만큼은 아니라도 녹물이 만 하루동안 세어서 젖었었는데 큰 피해죠. 그래도 저 아무 말 안 했었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쪽 회사에선 물건만 피해로 보고 우리가 제대로 사과받지 못한 마음, 출근 못학고 밤까지 새웠던 건 피해가 아닌가 봐요?"
"아닙니다. 피해죠. 당연히... 죄송합니다."
"담당자님 제가 무엇 때문에 화났는지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찾아오셔서 정식으로, 제대로 예의 있게 사과해 주세요."
"네, 네. 언제 뵐까요?"
"오늘은 제가 모임이 있어서 내일 뵙기로 하죠."
"네. 내일 오후 시간이면 언제든 좋으니 연락 주세요."
남편이 OO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 남편을 통해 사택 담당자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다른 팀에서 총무팀으로 온 지 얼마 몇 달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일이 좀 서툰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핑계가 될 수 없다. 분명히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고 담당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더 이상하다. 그렇게 큰 준 공기업에서 20대 중반 어린 담당자가 헤매고 있을 때 이끌어 줄 윗선이 없다고? 왠지 회사에서는 나 몰라라 하고 그녀의 등만 떠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하긴, 금방 알게 되겠지.
그녀를 만나기로 했으니 두고 보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녀 혼자일지,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일지...
만약 그녀 혼자라면 '양아치 준 공기업'이다.
약속시간 4시 보다 20분 먼저 연락이 왔다.
노란 보자기에 싸인 귤박스를 들고 있는 모습의 그녀가 혼자 덩그러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의 앳된 여자. 그녀 혼자 보내다니 양아치 준 공기업이 맞다.
"정말 너무 죄송합니다."
나를 보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여자의 얼굴이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푸석해 보였다.
"회사입장도 죄송한 거 맞죠? 왠지 담당자님 혼자 동동거리면서 수습하시는 거 같아서..."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말을 해버렸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당자는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후드득 떨군다.
"네. 회사 이사님도 아시고... 당연히 회사도 너무 죄송해하고 있어요."
내 예상대로 죄송은 하지만 어쨌든 총대는 네가(담당자) 메라는 게 회사의 입장인가 보다. 나는 회사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했는데 회사는 귀찮은 일 얼른 마무리 하자는 심보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심스럽게 귤을 내미는 모습이 안쓰럽다.
"이거 회사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 오신 거죠?"
살짝 당황하는 얼굴이다.
"담당자님이 개인적으로 사 주실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담당자님 미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까지 안 하셔도 되니까 받지 않으려고요. 회사분들과 맛있게 나눠드세요.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돈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시면 인테리어 업자와 함께 방문할게요. 고쳐 드려야 할 부분은 저희가 고쳐드려야죠."
굳이 바꿀 건 없을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녀가 한 말이다.
벌어진 장판, 싱크대 얼룩을 생각하면 속은 쓰리지만 그렇다고 바꿔달라고 하기도 귀찮다.
아니, 그보다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마음이 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남을 마무리하고 들어오니 바로 문자가 온다.
그녀는 정말 고마웠나 보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진심 어린 사과이다.
배상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진심 어린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피해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를 받지 못해 '사과해 주세요' 할 때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는지, 얼마나 억울한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마치 내가 유난 떠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짜증도 나고, 내가 성격이 모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 또 한 번 화가 나기도 한다.
당연히 받아야 할 진정성 있는 사과를 구걸하듯 받아야 된다면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피해자에겐 사과받을 권리가 있다.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어쨌든, 누가 뭐라고 해도 OO기업은 나에게 양아치 기업이다. 신입직원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게 돕지 않고 홀로 최전선으로 등 떠미는 나쁜 XXXX.
뒷말은 생략이다.
오늘은 그녀도, 나도 편하게 잘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