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륵한 피해자
물론 용서라는 게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와 동생이 태어난 후로 아버지가 용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이런 인간관계에 관한 기술은 적당한 쓸모가 나타날 때까지 능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나는 클로드와 연애를 할 때까지 내가 자연스러운 용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6년 전, 10년 전에 한 실수도 담아두었다가 어머니 본인도 잊어버릴 때쯤 술기운을 빌려 당시의 책임을 묻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실수'라는 건 아버지에게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행이지 대개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에게 사무적으로 미소지었다거나 아버지의 수저를 깜빡했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6년, 10년을 '존버'해 가며 따져 물을 것들은 못 되었다. 아니, 따져 물을 거리조차 못 되었다. 이런 아버지의 습관 때문에 술 마신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이면 나머지 식구들은 행복할 수 없었다. 오늘은 또 몇 년 전까지 시간을 건너뛰나, 오늘은 또 누가 공양이 될까.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살얼음을 걷는 듯 불안해했다. 당연히 그 경직된 공기는 우리 남매에게도 '오늘은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줬고, 나는 성년이 되어서도 '즐겁게 취한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별 것 아닌 일에 온 힘을 다해서 화내는 아버지였다. 어린애가 넘어지면 그걸 왜 똑바로 걷지를 못하느냐며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오전 내내 화를 냈고, 동생은 음식 옆에서 뛰어놀았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했다. 내가 비슷한 일을 했을 땐 여자아이로 태어난 게 다행인 줄 알라며 매를 쥐다 말았다. 무엇에 화를 낼지, '맞아도 싼 일'은 무엇인지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오롯이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 화가 풀리고 나면 어떻게 되었느냐고? 아버지는 화가 풀린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때로는 이상할 만큼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싸해진 분위기를 나름대로 만회해 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남매가(당시에는 아직) 아버지를 퍽 좋아했던 것과 별개로 아버지의 존재 자체는 재앙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언제, 무엇 때문에 화를 낼지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화에 따르는 체벌도 일관성이 없었다. 돌발성 호우 같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비가 온다고 하늘에 화를 내지는 않듯이, 어린아이에게는 어른의 존재가 하늘 같았다. 그 어른의 행동이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더 가까이에 있는 내 탓을 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말이다. 엄마도 그렇게 말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분노에도, 애정에도 맥락이 없었다. 자연히 나는 용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진짜 용서가 나한테 어떤 감정을 주는지 체득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생각하기 싫은 일을 어딘가에 묻어 두고 내가 '용서'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묻어둔 일이 내 속을 썩일 때는 '용서가 공짜가 아니라서 그래'라고 생각했다. 뭐든 별것 아닌 것처럼 쿨한 척을 하는 게 나의 방어기제였다. 나는 나와 동생이 자라면서 당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 감정적인 학대들이 '한국 사회에 흔한 특유의 교육법'이라 생각하는 편이 기분을 더 낫게 했기 때문이다. 아직 헤어나지 못한 효자병도 한몫했다. 당한 것은 나면서, 꽤 오래 출처 모를 죄책감에 시달렸다. 30세를 기점으로 이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털어내지 못했다면 몇 년 전쯤 이미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 충동 때문에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멍청하지만, 또 생각보다 똑똑하다. 한 인간 속에서 이 상반되는 주장들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존재이다. 나는 사람들이 겪는 많은 문제의 답을 그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알고는 있지만 아직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할 뿐 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왜 용서가 이리 힘든지에 대한 나의 답은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이고, 그 기저 원인은 어릴 적의 학대였음에도, 이를 인정하는 순간 유구한 유학사상의 전통과 부모의 존엄에 한 점 티끌이 되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아주 컸다. 많은 것을 떨쳐낸 지금은 또 생각이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해자 입장에서 생각한 과거의 나는 아주 갸륵한 피해자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