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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용서하는 방법 - ③

내가 남편을 울렸을 때

 대학생활 내내 나는 내가 '사회성이 조금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성이 조금 모자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큰 소리를 내는 남자들 앞에서 겁을 먹는 증상이나 아버지처럼 키가 큰 남자들 앞에서 손끝이 떨릴 만큼 겁을 먹는 증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부모님은 남의 이목에 아주 신경을 쓰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내 삶은 '잘' 지어져 있었다. 나만 잘 숨기면 내가 학대 피해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거다. 차라리 피지도 않는 담배 금단증상 때문에 손이 떨리는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게 효율적이고 편했다. 나는 이해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평범해지고 싶었다. 오직 사랑으로 자란 사람처럼 보이는 게 원이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이런 전략이 잘 먹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내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거나 '너 지금 힘들구나' 등의 갸륵한 말로 아는 척을 해올 때는 그들의 인생에서 도망쳤다. 가정사 부분까지 포함해서 나를 아는 친구가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거야'라고 했을 때 나는 허세를 부렸다. '이깟 거, 평생도 할 수 있어. 불쌍한 사람만 되지 않는다면.' 그 도망이 내 삶을 더 퍼석퍼석하게 만들고 있는 줄은 모르고. 어쨌거나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나는 차근차근 피해자의 배역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3인분의 평화를 위해 집에서는 생계형 지랄을 했고, 그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는 술로 풀었다. 삶을 점점 흑과 백으로만 보기 시작했다. 적과 친구, 개새끼와 착한 놈, 고통 아니면 기쁨.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우친 것이 27살도 다 되어서라면 믿어지는가.


 우리는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울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클로드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는 사람은 울음을 멈출 때까지 달래줘야 하니까, 그게 인간다운 거니까. 하지만 클로드가 왜 우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잘못했다. 너, 이만큼 잘못해놓고 그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잘못을 했으면 말로든 뭐로든 혼나야지.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뭘 잘했다고 울고 있어? 속으로 여기까지 생각한 후에 깨달았다. 똑같은 말을 했던 사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완벽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당연한 것인데, 나도 누군가의 속을 찢어발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는 클로드 앞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클로드에게 내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도 충분히 많았다. 굳이 클로드가 제일 아파할 만한 말을 고르고 골라 날카롭게 벼려 심장에 꽂아놓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놓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지가 먼저 잘못해놓고 울고 있네?' 였으니. 왜 가장 포근해야 할 우리 집에서 나는, 못된 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찌르고 있나. 머리가 멍했다. 나는 피 냄새를 맡은 투견 같았다. 5초도 생각하지 않고 클로드가 가장 아파할 만한 말만 골라 마음에 찔러 넣었다. 겁도 없이 내게 싸움을 걸었으니 싹부터 밟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서. 거의 무조건 반사였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여기는 부모님의 집도 아니고, 3인분의 (상대적)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시절은 지나갔다. 클로드는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왜 한 큰 술의 말로도 해결될 일에 한 가마의 책망을 들이부었을까.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자잘하게 싸울 일은 많았다. 어느 날 클로드가 '넌 나를 용서해준 적이 있어?'라며 물었을 때, 진짜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용서? 당연히 해봤지, 근데 그게 어떻게 하는 거더라.


 내 전공인 복수가 카운터 블로를 얼마나 잘 먹이는지 심사하는 상대평가라면 용서는 일종의 P/F 과목이었다. 문제 된 일을 묻어버리면, 언급하지조차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결과물만 비슷하면 사람들은 과정을 들춰보지 않았다. 어중간한 관계에서는. 당연히 진지한 관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용서하는 법을 모르는구나, 이 눈속임이 클로드한테는 안 통하는구나. 내가 한 말에 정말로 사람이 무너질 수 있구나. 내 용서의 매립장을 뒤집어엎을 순간이 온 것이다.


"람, 나는 네가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 일들이 나와 너의 생활에 반복되지 않기를 원해."


 클로드가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히 말했다. 싫어도 직면해야 했다. 어쩌다 한 번씩 좋은 순간이 있었다 해서 내가 학대를 당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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