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두 파랑 #1

BLUE (4) Blue & Blue in Portugal #1

by 도자기로드

BLUE 4

포르투갈의 두 파랑 (1)

Blue & Blue in Portugal (1)

글쓴이 김선애 도예가



“Blue is the typical heavenly colour. The ultimate feeling it creates is one of rest. When it sinks to almost black, it echoes grief that is hardly human.”
파랑은 전형적인 하늘색이다. 파랑이 만드는 궁극적인 느낌은 휴식이다. 파란색이 거의 검은 색으로 가라앉으면, 그것은 거의 인간이 아닌 슬픔을 울린다.





최근 플라워클래스를 듣고 있다. 시각적 즐거움과 향기를 즐기기만 하던 꽃을 직접 ‘다루게’ 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손으로 꽃을 오래 잡고 있으면 꽃이 금새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빠른 손놀림 또한 필수적이라고 한다. BLUE 시리즈를 기획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Blue & White 도자기를 다시금 바라보니 접시 위의 꽃장식이 마치 내가 손에 땀을 흘리며 장식하던 꽃다발처럼 보인다.

청화백자는 화려함을 추구했던 당시 사람들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이상적인 색, 파랑에 담긴 최상급 럭셔리 아이템 중에서도 T.O.P 이다. 하얀 여백은 마치 꽃을 감싸는 포장지와 같고, 꽃다발을 받았을 때 그 기분처럼, 청화백자를 선물로 받았던 사람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게 된다.





파랑의 여정은 포르투칼에 잠시 머물기로 한다. 포르투갈은 도자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이다. 파랑은 이제 넘실대는 파란 파도와 하늘 결을 따라 포르투갈 해변에 정박했다.


1498년,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 일행은 인도에 도착한다.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접해있었기 때문에 대항해시대를 열기에 지리적으로 우월한 위치 있었다. 포르투갈의 원래 목적은 인도에서 후추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배는 1517년 처음 중국에 도착해 통상을 요구했지만, 교역을 거부당했다. 하지만, 40년 후 마침내 이들의 배는 공식적으로 중국의 마카오 조차권을 얻게 된다. 그사이에 밀무역으로 교역했다고 전해지는 데, 그 예는 알바레스(Jorge Álvares bottles) 꽃병을 통해서도 잘 확인할 수 있다. 청화백자 병에 거꾸로 알파벳이 쓰여있는데, 현재 영국 Victoria & Albert Museum에 진열되어있다. 알파벳의 아래위를 모른 징더전의 도공들 덕분인데, 그들 덕분에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이렇게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청화백자는 유럽에 전해지게 된다.


Blue_4-13.jpg 다양한 패턴과 장식의 아줄레주 타일, 사진 김선애


교류의 시작



중국과 포르투갈 (Sino-Portuguese) 관계는 중국 명나라로 올라가 마카오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중국무역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1520년대에는 그 결과로 중국도자기 대략 4만~6만 점이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징더전 청화백자 접시 260여 점이 붙어있는 산토스 궁전 천정은 중국수출자기로 장식된 것으로 유명하다.


한동안 중국 수출자기에 열을 올렸던 포르투갈은 이후에는 유럽에 중국 도자기를 팔지 않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유럽 상권을 장악했던 네덜란드에 있다.


이 당시 동방무역에 관해서는 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경쟁하였는데 두 나라 배는 만나면 으르렁~하고 싸울 정도였다고 한다. 네덜란드가 이러한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중국 자기 독과점을 그냥 보고만 있을리 만무하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가 설립되고 네덜란드가 도자기 무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파랑으로 인한 전쟁이다. 1602년과 1604년에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호와 카타리나호가 네덜란드에 나포된 것을 계기로 중국 도자기의 유럽 수출에 관한 주도권이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 상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카락에 실려온 아이템들은 옥션에서 팔려나갔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의 도자기 열풍에 불을 지폈다. 프랑스 왕 앙리 4세를 비롯한 유럽의 왕족, 귀족이 중국 자기를 손에 넣으려고 광분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 이후에 포르투갈인들은 리스본에서 후추 등 의 향신료를 취급하는데 만족하고 굳이 자기를 교역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추측할 뿐이다. 네덜란드의 파란도자기에 관련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Blue_4-8.jpg 다양한 패턴과 장식의 아줄레주 타일, 사진 김선애
Blue_4-9.jpg 다양한 패턴과 장식의 아줄레주 타일, 사진 김선애


Blue No.1 카락자기(Kraakporselein)


중국청화백자를 가득 싣고 이제 정박한 포르투갈의 배로 올라가 보자. 중국의 청화백자가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다. 그 안에 넘실대는 푸른빛의 무리, 카락자기라 불리는 중국 수출자기(Chinese Export Porcelain)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카락자기는 포르투갈 배를 지칭하던 ‘Carrack’에 실려 들어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카락자기라 부르고, 만력제 수출자기 또는 청화백자 부용자기 등으로 불린다.


꽃잎처럼 얇은 이 도자기는 잘 깨지기로도 유명했다. 전 부분에 살짝 깨지는 이유가 부용자기의 구획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었는데 (물론 근거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에 따라 카락이라는 어원이 ‘깨지다‘라는 말의 더치어 kraken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다.


주로 크기가 큰 접시나 사발에 일정한 구획이 나누어져 있고, 그 패널에 따라 장식이 들어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가 꽃잎 같아 일본에서는 ‘부용자기‘ 부른다. 이 자기가 중국 징더전에서 구워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후반으로 이처럼 접시나 깊은 볼 형태의 사발을 꽃잎과 같은 디자인으로 장식하는 예는 페르시아 도기에 그 유례가 있다고 한다. 문화의 집결체이다. 사발 하나에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가 모두 담긴 이런 매력적인 콤팩트 아이템이 어디 있을까.


카락자기의 어원이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 단어는 철저하게 유럽인들 중심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당시 중국 현지에서는 어떠한 이름으로 불렸을까 알 수가 없다. (적어도 나의 짧은 연구조사에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 도자기는 중국 수출자기, 즉 유럽 시장을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철저하게 시장과 수요를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유럽으로 건너가서 포르투갈에서 재해석 되고 다시 제2의 인생을 살았던 도자기의 일생이 그래서 더욱 더 궁금하다.


후에, 크락자기는 더치와 플래미쉬 (Flemish) 정물화에서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 델프트웨어로 많이 복제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 배에 실렸던 중국 수출 자기는 유럽전역으로 퍼져 17,18세기 유럽의 중국풍 취미 시누아즈리 유행의 밑바탕이 되었다. 더치 델프트웨어는 다시 영국으로 넘어와 영국델프트웨어, 영국 블루앤 화이트 자기, 도기로 발전된다. 이렇게 파랑의 흐름이 이어간다. 역사 속에서 파랑으로 나타난 빛은 공간 구석구석에 머물며 그 흔적을 남겼다. 마치 빠른 빛의 속도가 아쉽다는 듯 꼬리를 남기며 사회, 문화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제, 포르투갈 본토 흙에서 자라난 파랑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포르투갈 타일 리서치를 떠났을 때, 포르투갈의 파랑의 첫인상을 마주했다. 카락자기가 중국에서 넘어온 이국적인의 파랑으로 깊이가 깊은 바닷물에서부터 해안까지의 파랑을 폭넓게 보여주고 있다면, 포르투갈 본토의 파랑은 파르스름하고 푸른 기운이 넘쳐흐르면서도, 마치 처음 물감튜브를 따고 새롭게 물감을 처음 썼을 때 느끼게 되는 감흥이 있다. 쨍~하고 느끼는 색의 첫 경험도 간직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파랑은 오래된 건물 벽, 건축과 포르투갈인의 삶에도 녹아들어있다. 햇살이 건물의 외벽을 비출 때 느낄 수 있는 삶의 보금자리에서 느껴지는 안식감이 든다. 파랑이 주는 궁극적 느낌은 휴식이라는 칸딘스키의 말처럼 주거공간에 들어온 하늘의 색. 그 시작을 잠시 들여다보자.



Blue No.2 아줄레주 Azulejo


아줄레주는 아랍어 (az-zulayj)로 작고 반짝거리는 돌(Polished, Little Stone)이란 뜻으로 5~6인치 크기의 장식타일을 뜻하는 말이다. 그 기원은 13세기로 올라가는데 당시 길거리 보도가 기하학구조의 타일로 만들어졌고, 15세기 후반 또한 스페인 발렌시아에 수입해온 보도타일의 예도 발견된다.


아줄레주가 적극적으로 포르투갈에 도입된 계기는 포르투갈 왕 King Manuel I(1469~1521) 덕분인데, 스페인 남서부 지방 세비야(Seville)를 방문 후 아줄레주 타일 아이디어를 포르투갈 문화에 접목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아줄레주 타일을 수입해 일반적으로 건물의 외 내벽, 개인적 공간(파사드), 종교와 관련된 성당 등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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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줄레주로 장식된 리스본 거주지역 건물,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줄레주 타일 표지판, 사진 김선애


Blue_4-4.jpg 리스본 벼룩시장에서 만난 아줄레주 타일, 사진 김선애
Blue_4-10.jpg 다양한 패턴과 장식의 아줄레주 타일, 사진 김선애


Blue_4-12.jpg 다양한 패턴과 장식의 아줄레주 타일, 사진 김선애


포르투갈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 이슬람교 지배권에 따라 발생한 무어양식이 독특하게 발전했는데, 이 또한 아줄레주 장식에 영향을 미친다. 16세기 동안, 아줄레주 타일은 이슬람 모티브의 매듭 장식, 기하학 형태의 장식에서, 식물 동물 무늬가 들어간 유럽스타일 장식으로 점차 바뀌었는데, 히스패닉-무어 스타일 (Hispanic – Moorish)의 테크닉은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아줄레주 타일은 발견시대(The Age of Discoveries, 15~18세기)에 유행이었던 파랑과 하양이라는 간단한 컬러코드가 대부분이었고, 금색을 나타내던 노란색의 장식이 들어간 곳도 있었다. 사진을 보면 포르투갈 인들의 자유로우면서도 사각 타일 안에 틀을 깨는 화려한 장식 문화가 엿보이는데, 대부분 장식은 네모난 타일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선다. 반복된 타일에 의해서 예술로 표현된 파랑이 무한대로 뻗어나간다. 지금도 포르투갈 리스본 지역을 다니다 보면 주거지역, 상업시설 따로 구분하지 않고 타일이 일상 곳곳에 발견된다. 일상 도자기의 친숙감이 시각적으로 더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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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줄레주 타일 제작방법, 사진 김선애


- 다음글에 포르투갈의 두 파랑(2), 리스본 국립타일박물관 편이 이어집니다.



** 월간도예 2018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 내용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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