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워 오브 도그'에 상상을 덧붙여 이후의 이야기를 그려보았다.
나는 너를 벌하고 있다.
정성껏 갈고 간 날카로운 칼로 피부를 열고 근육을 헤치고 뼈를 꿰뚫는 지금 이 순간,
화려하게 뿜어지고 있는 피는 네 희미한 눈물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다.
형태 없는 말들이 네 입가에 한데 섞여 출렁이다가 결국 범람한다.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같은 말을 읊고 있는 입술을 조정하는 힘줄에 의해, 같은 면에 있던 눈의 장막이 걷힌다.
다시금 네가 담고 있는 나를 확인하고 간절히 기도한다.
주여, 그저 저를,
개의 아가리에서 구하옵소서.
피터가 버뱅크목장에 월랜드씨를 데려온 건 조지의 장례를 치른 지 꼭 1년이 지난 후였다. 월랜드씨는 버뱅크 집안의 먼 친척으로 장례식 때 로즈와 인사를 나누었고, 피터와도 잠시 대화를 나누었었다.
동부 명문가 출신의 변호사, 그는 온전히 자신의 벌이로만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의 집안은 부친의 투자 실패로 재정상태가 거의 말라버렸고, 부유한 친척들의 도움으로 명문가 출신으로서의 구색을 겨우 갖추고 지냈다. 그의 부모는 어느 다정한 친척의 배려로 상류층 주거지역에 위치한 저택에서 생이 다할 때까지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의 누이들은 집안의 허실을 숨기고 그럴싸한 집안들과 화촉을 밝혀 상류층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빠듯한 경제사정과 아직 건재한 명문가 타이틀, 이것은 피터가 보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의 다음 아버지감으로 말이다.
두 번째 장례를 치른 로즈에 대한 소문은 첫 번째 이후보다 더 독하고 매혹적인 것으로 변해있었다. 호사가들은 그녀를 메리로즈(피의 여왕, 메리에 빗대어)라는 애칭으로 칭하며 거세게 물어뜯는 한편, 그녀의 이야기에 환상을 덧붙였다.
그녀의 남편들은 둘 다 살아있을 때 각자의 독특한 면들 때문에 업신여김을 종종 받긴 했었다. 그러나 의사로서 사회적 호의를 받았던 첫 남편 조니 고든과, 대목장 소유주로 뭇사람들의 경외심을 사던 두 번째 남편 조지 버뱅크. 로즈는 명성 있는 남자들에게 연이어 선택받은 '고귀한 여성'이란 타이틀과, 그 둘의 죽음으로 인해 '위험한 꽃'의 이미지를 함께 부여받았다. 특히나 대목장을 상속받게 되면서 부유한 미망인이 된 로즈를 두고, 뭇 남성들은 그들의 속물근성을 발현시켜 그녀의 위험함 보다는 고귀함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 처량한 사연을 지닌 여인에게 그들이 과한 연민을 표하는 데에 있어 적절한 명분이 되었다.
위로를 가장한 구애 편지와 방문에 지친 로즈는 사교활동을 거부하고 목장 관리에만 집중했다. 피터는 그런 로즈를 영 마땅치 않아 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구상한 그림-이상적인 가족 청사진의 완성을 위해, 로즈는 마지막 도약을 해야 할 터였다.
피터는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괜찮은 집안과 재산 모두를 갖춘 남성을 그 그림의 빈자리에 넣으려면, 이전에 겪었던 과정과 비슷한 수위의 고난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공시킨다면 로즈와 자신의 입지가 더 탄탄해지겠지만, 굳이 과한 욕심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거의 다 갖춰진 그림에 적당한 퍼즐 한 조각만 더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퍼즐의 재료가 될 상대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어야만, 그 그림을 안전하고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피터는 허울 좋은 이름을 그에 걸맞은 재산 없이 겨우 지탱하고 있는 월랜드를 퍽 흡족해했다.
로즈는 필이 죽었을 때 처음에는 안심했었다. 그 마음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버뱅크 저택에 친근함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지하실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보일러 소리에 위협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아무 때고 피아노 뚜껑을 열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는 다시 조지의 장식장에서 술을 훔치게 된다. 필이라는 문제는 조지와의 문제를 가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지는 로즈를 사랑했다. 정확히는 로즈가 가지고 있는 그의 이상형의 모습을 사랑했다. 로즈는 주지사 부부를 초대했던 그날, 요청받은 피아노 연주를 끝내하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던 조지의 눈에서 그걸 읽어내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건 필에 대해 로즈가 느끼고 있던 위협감에 비해서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버뱅크 목장의 안주인이라는 형상은 조지의 머릿속에 꽤나 구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의 모습과 그가 읽었던 잡지에 나온 귀부인들의 모습들의 부분들을 모아 조립해 놓은 형태였다. 그는 어머니의 단골 의상실을 따라 이용함으로써 조금씩 갖춰지는 로즈의 차림새와, 언젠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피아노를 연주하는 귀부인의 사진에서와 같이 피아노에 앉은 그녀의 자태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명망 있는 집안에 초대받았을 때 그 집안의 꽃병들을 안주인이 직접 관리한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아내도 꽃꽂이를 한다고 맞장구를 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했다.
그러나 조지는 로즈가 그 보기 좋은 뮬을 신을 때마다 절뚝거린다는 것과, 막이 쳐져있지 않은 장소에서 피아노 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몰랐고, 그녀가 완성한 꽃이 아닌 꽃꽂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눈치 채지도 못했다.
로즈는 언젠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었다.
그날 오후, 바깥의 고철무덤에 숨겨놓은 술을 가지러 간 그녀는 자신이 꽃이 아닌 재료로 완성한 꽃꽂이가 탁자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창문을 통해 보게 된다. 거센 바람이 문틈 사이로 침입해서 일 수도, 아직 일이 서투른 어린 하녀가 바닥을 청소하다가 실수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로즈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누군가가 저것을 자기 대신 굴복시키려는 의도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필이 나타났다. 로즈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눈을 올려 필을 살폈다. 필은 쓰러진 로즈의 작품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뻗어 조심스레 매만지기 시작했다. 로즈는 눈을 거두고 몸을 더 낮춰 웅크리고, 그가 내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후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탁자 위를 확인했을 때, 그 꽃꽂이는 로즈가 처음 만들어놓았던 형태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조지가 꽃을 잔뜩 가져와 안기며 이제는 당신에게 '좀 더 어울리는' 꽃꽂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했던 어느 날, 로즈는 다시 필을 떠올렸다. 언젠가 욕실의 반대편 문틈으로 필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을 때, 그는 직접 조각하여 장식장 안에 모셔둔 자신의 작품들을 매만지고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세월의 흔적으로 삭아버린 나무 조각품의 한 모서리를 다듬으며 그가 내비쳤던 눈빛을 로즈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쓰러져있던 자신의 작품을 매만지던 그때의 것과 닮아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로즈는 갑자기 일어나는 복잡한 심경을 어떠한 말로 풀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자신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조니 고든은 로즈를 종종 '밴더빌트 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드높은 대부호의 아내와 자신의 아내가 퍽 닮았다는 것에 대해 묘한 자만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내를 밴더빌트 부인의 어설픈 복제품 정도로 여겼다는 뜻은 아니다. 조니는 아직 로즈의 진면목이 겉으로 더 드러나던 시절에 그녀를 만났었기에, 두 번째 남편보다 더 로즈의 실체에 맞닿을 기회가 많았고 그녀의 진짜 면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갖춰야만 한다고 여겼던 삶의 구색을 직접 얻어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이 많았기에, 아내가 생활의 최후 방어선을 본인 대신 지켜주고 있다는 것에 조용히 안심했다. 그 때문에 조니는 본인도 소중히 여겼던 로즈의 면면들을 손상되어가고 있는 걸 모르는 체 했다. 그리고 밴더빌트 부인을 닮은 아내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가치 증명이라는 낙관적인 착각 속에 자신을 가둬버렸다.
고든부인이 되기 전 지고지순한 사랑을 서로에게 주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로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로즈는 조니가 자신을 어찌 바라보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그가 부여하는 자신의 역할이 그리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기에 받아들였다. 조니는 실상 로즈에게 생활을 의지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그의 옆에 있을 때 그녀는 삶을 스스로 일구고 있다는 걸 매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조니는 처참할 정도로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기에, 로즈는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형인 필이 죽자 조지는 버뱅크목장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고, 필의 기에 눌려 스스로 원하는 줄도 몰랐던 프레임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첫째 아들의 날카로운 눈에 늘 자신들의 허영심을 당당히 펴고 살지 못했던 버뱅크 노부부는, 이제야 묵혔던 기지개를 켜고자 했다. 그들은 로즈와 피터를 포함하는 '조지 버뱅크 가족'과 함께 사교적 연출극에 참여하게 된 것에 무척 만족해했다.
처음에는 로즈도 그것이 좋았다. 그들의 따스한 눈길이 진정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점점 묘한 균열감을 느끼게 된다.
시부모가 초대한 대규모 만찬에서, 나름 명망 있다는 집안의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자신의 출신에 대해 누군가 물으면 솜씨 좋게 말을 돌리는 노마님과 자신의 첫 남편에 대한 미담을 부풀려 전하는 노인장과 거듭 피아노 연주를 권하는 조지.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그 모든 것에 원래부터 익숙한 듯 행동하고 있는, 노부부에게 친손자 마냥 미소를 보이며 사람들의 중심에 서서 당연하단 듯이 조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나의 아들. 그리고 피터는 이제 로즈를 이름 대신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로즈가 조지의 장식장 속 술들을 다시 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필이라는 적이 사라진 이후 피터는 로즈 자체로서의 로즈보다는, 가족그림 속의 로즈를 본격적으로 원하게 되었다는 거- 그 사실은 로즈를 옅은 절망감과 외로운 기분으로 몰아넣었다.
-(하)에서 이어집니다.-
[ 파워오브도그: 에필로그(상)_ 도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