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 지는 사람
전략 컨설턴트라는 이름으로 27년을 살아왔다.
버텼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기업 전략팀, 지주사 중장기 과제, 그룹 경영체계 설계, 구조조정,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
수없이 많은 보고서와 워크숍, CEO 앞에서의 발표와 조직의 눈치를 넘나들며 살았다.
‘전략’이라는 말을 너무 오래 써서, 어떤 날은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황이 바뀌었다.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방향을 짰다면, 이제는 기계가 시사점을 던지고, 사람이 그걸 해석한다.
처음엔 가볍게 넘겼다. ChatGPT? 신기하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회의에서 후배들이 “GPT로 초안을 짰다”라고 말할 때, 클라이언트가 “요즘은 AI로 전략도 세우는 거죠?”라고 물을 때, 내 속에서 오래된 무언가가 부스럭거렸다. 그 불편함은 곧 자각이 되었다.
수년간 써온 프레임, 구조화된 접근법,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감. 이제는 그 모든 것이 AI의 계산력 앞에서 너무 느리고, 때론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예측은 더 빨라졌지만, 그 예측이 정말 ‘의미’ 있는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데이터는 넘쳐나지만, ‘이 방향이 맞다’고 말해줄 사람은 사라지고 있다.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전략가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기계는 수천 개의 옵션을 보여줄 수 있지만, ‘이 중에서 어떤 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결과에 대해 조직을 설득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지금의 전략가는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기술도 알아야 하고, 조직도 이해해야 하고, 무엇보다 혼란에 익숙해져야 한다. 단순히 똑똑해서는 부족하다. 어설픈 직관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그 중간, 모호하고 불확실한 지점에서 끝까지 붙잡고 버티는 힘. 그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가의 힘이다.
나는 지금도 다시 배우고 있다. AI 툴을 익히고, 산업의 맥을 다시 짚고, 사람들의 변화를 읽는다.
전략이 기계의 계산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사람의 판단, 사람의 문맥, 사람의 미래가 빠지지 않도록.
전략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일.
그리고 그 말 뒤에, 27년의 시간과 실패와 시행착오가 서 있음을 나는 안다.
그래서 다시 쓴다.
기계가 못하는 방식으로,
조직과 사람과 변화 사이에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