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대화가 글이 되는 마법, 맞춤법의 함정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저학년 아이를 둔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일기 쓰기'와 '독서록 쓰기'이다.
한글을 뗐으니 이제 제법 길게 글을 쓰리라 기대하지만, 아이는 연필만 쥐면 몸을 비비 꼬며 고통스러워한다. 이는 아이의 인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초등 저학년의 뇌 발달 단계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글씨 쓰기는 아직 뇌의 중노동이다
미국 워싱턴 대학교의 교육심리학자 버지니아 버닝거(Virginia Berninger, 2012)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쓰는 행위는 엄청난 인지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중노동'이다.
성인에게 글씨 쓰기는 자동화된 동작이지만, 소근육이 아직 정교하게 발달하지 않은 8~9세 아이들의 뇌는 자음과 모음의 모양을 떠올리고 손가락 근육을 통제하는 데 전두엽의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거의 다 써버린다.
머릿속에 재미있는 생각이 가득해도, 그것을 글로 옮길 인지적 여력이 뇌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림은 가장 훌륭한 첫 번째 글쓰기다
이 시기 아이들의 뇌는 추상적인 기호(문자)보다 시각적이고 직관적인 이미지(그림)에 훨씬 익숙하다. 독락서쾌에서 저학년 지아 학생을 지도할 때, 억지로 책의 줄거리를 쓰게 하는 대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마음껏 도화지에 그리게 했다.
그림을 다 그린 후
"지지야,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라고 묻자 봇물 터지듯 생생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초등 저학년에게 글쓰기의 시작은 '그림'과 '말하기'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말로 쏟아낸 기발한 표현들을 부모가 대신 적어주어 자신의 생각이 문자로 변하는 과정을 눈으로 보게 하거나, 아이가 스스로 단 한 줄의 문장만 그림 밑에 쓰게 해도 훌륭한 글쓰기 훈련이다.
맞춤법 지적이 글쓰기 동기를 파괴한다
저학년 글쓰기 지도에서 부모가 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맞춤법과 띄어쓰기 교정'이다.
간신히 한 줄을 써낸 아이에게
"여기 받침이 틀렸네",
"띄어쓰기를 해야지"라고 지적하는 순간, 뇌의 편도체가 자극받아 글쓰기를 '위협'과 '불쾌함'으로 각인한다.
이 시기의 최우선 목표는 완벽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즐거운 놀이'라는 긍정적인 도파민(Dopamine) 회로를 뇌에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상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놀이
이 시기에는 교훈적인 내용이나 거창한 주제보다 일상의 오감을 활용한 주제가 뇌를 활성화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
"오늘 먹은 아이스크림 맛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비 오는 날의 냄새를 무슨 색깔일까?"처럼 감각을 자극하는 엉뚱한 질문을 던져보자.
맞춤법이 엉망이어도, 삐뚤빼뚤한 글씨로 기발한 상상력을 적어낸 아이의 글을 향해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주어야 한다.
읽는 뇌에서 쓰는 뇌로 넘어가는 이 결정적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붉은 펜이 아니라, 아이의 서툰 문장에 열광해 주는 부모의 따뜻한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