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녀, 전 혜 린
나는 어릴 때부터 가히 독서광이라 불릴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 아마 한글을 떼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활자화된 것은 무조건이었어. 그 덕에 또래 친구들보다 엄청난 독서량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에 따른 약간의 부작용이 내가 이해하기 힘든 책들도 읽었다는 거지.
아마도 중학교 1학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게는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대학생 언니가 있었어. 언니에게는 내가 대화상대가 되지 않는 늦둥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넘치는 독서로 인한 애늙은이가 들어앉아 있었지.
언니가 부재중일 때 몰래 들어가 닥치는 대로 책을 가져와 읽었는데 어느 날 책꽂이 한편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더라. 일단 솔깃했어.
그리고 읽어 내려가는데 글자 한 자 한 자가 내 눈을 통해 내 온몸에 박히더라고.
다독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속독의 습관이 생겼는데 그 두껍지 않은 책은 왠지 모르게 빨리 지나치지를 못하고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가면서 읽어야 했어.
1980년대 초반의 중학생이 그 내용을, 전혜린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어?!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글에 빠지고 그녀의 우울과 비관적인 논조에 빠지고 결국 그녀에게 빠져 들었어.
몇 번을 읽었는지 몰라.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독일>이라는 나라의 <뮌헨>이라는 도시에서 그녀가 써 내려간 인간에 대한 탐구는 경이로움을 넘어 내 사유의 기조를 바꿔놓았지.
최고학부의 지성을 가진 신여성이 독일이라는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서 비 내리고 어두운 뮌헨의 술집에서 인간본질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들과 그녀만의 깨달음들을 읽으면서 어린 여중생은 꿈을 갖게 되었어.
"나도 전혜린이 되어 불꽃처럼 살다가 요절하리라!"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감싸주지 못한 채 영원히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녀의 X를 원망했지.
몇 년 후 나는 내 아버지의 숙원이기도 했던 법학과에 진학을 했고 1학년 1학기에 법학개론과 아울러 <헌법학개론>을 배우게 됐는데 책의 저자가 낯이 익은 이름이었단 말이야.
대한민국 대표 헌법학자이자 <김철수 헌법>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 놓은 바로 그분- 법학도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분이 내가 흠모하던 전혜린의 X였던 그분이더라고.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를 하고 내가 전혜린이 사랑해 마지않던 독일로 유학을 오게 된 거야.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전혜린의 영향과 고등학교 시절 철학을 전공하셨던 국민윤리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내 사유의 방향은 정해졌고 철학에 대한 나름의 공부로 독일에서 한껏 업그레이드될 내 사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냥 부풀었지.
내가 처음 본 독일은 그녀가 책에 서술해 놓은 독일과 정말 같더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비와 우울이 도시 전체를 나아가서 사람들 전체를 젖게하는 곳. 말로만 들어서 알고 있던 저명한 철학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거리.
비에 젖은 어깨들이 부딪히는 좁은 카페에서 열띤 논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곳에서 그녀가 공부를 하고 삶을 살았구나 하는 가벼운 전율을 느끼기도 하면서 나는 유학초반 내내 그녀를 기억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내가 살아보니 말이야..
내가 한 사람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법학을 공부하려는 유학생으로 그 이름들을 주렁주렁 걸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 오래가지 않아 나는 그녀를 잊어야 했고 결국에는 완전히 버려야 했어.
나는 <요절>할 수 없었거든.
나는 동경했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배신>하는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내야 했거든.
비로소 나는 전혜린의 철수가 왜 그녀의 우울과 고독과 비관에 동조하지 않았는지, 할 수 없었는지 알게 되었거든.
나도 내 오랜 첫사랑의 그녀를 버렸거든.
내 안의 그녀를 버리지 않으면 아름답지만 잔혹한 독일 유학생활에서 나와 내 가족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나는 내 첫사랑과 결별을 했고 현실세계로 돌아와서 그야말로 현실철학적인 삶을 시작했지.
하지만 현실에서의 범인으로써의 과제들을 잘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남들만큼 풀고 나니 다시금 그녀의 실존적 고독과 자기 성찰에 관한 질문이 나의 한편에서 몽글몽글 해짐을 느끼는 요즘이야.
그녀는 특히 사랑은 의존이나 소유가 아니라 고독한 존재로서의 상대를 이해하고 각자의 고독을 존중하는 만남이라고 여겼지.
지금, 어느 때보다 내 첫사랑의 그녀가 생각나는 겨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