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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Aug 15. 2020

독신으로 산다는 것 94
초원사진관에서

독신공감

한국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내 인생의 멜로 영화다. 남녀 주인공간에 그 흔한 입맞춤 장면 하나 없지만 서로 조심스럽게 교감하는 감정의 여정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섬세하고 담백하게 흘러가던지. 여기에 ‘아들’과 ‘오빠’ 그리고 ‘친구’를 잃는 슬픔이 잔잔히 스며있고. 남녀 주인공 사이의 그 추억도 여백으로 남겼다. 


아련함이야말로 멜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서적 지점이며 이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멜로 영화의 가장 큰 관건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처연하거나 서글프지 않지만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어 마음이 아픈 ‘아련함’을 영상언어로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기에 인생의 멜로 영화로 꼽고 있다. 


그래서 훗날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요 무대인 군산 초원사진관을 가게 된다면 영화에서처럼 다림이가 더위에 지쳐 정원의 사진관에 들어가 선풍기 바람에 땀을 식히던 8월에 가야 제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상 그 생각은 휴가 첫날 아침. ‘비가 안 오는 동네’를 찾다가 군산으로 차를 몰면서 아! 하면서 떠올렸지만..

군산 구 시가지 내 초원사진관 앞에는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내부 관람을 위해 줄을 서 있는 젊은 관광객들 가운데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꼬맹이였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자 멀뚱히 그 줄에 서 있다가 내부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몇 분 동안 초원사진관과 관광객과 모처럼 햇살에 맑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허진호 감독.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1998년 1월에 개봉했다. 개봉 당시 허 감독의 나이는 35세. 한석규 배우는 34세, 심은하 배우는 26세였다. 내 나이는 22세. 군대 가기 1 개월 전이었다. 신문기사에 호평이 올라왔지만 그때만 해도 영화는 누군가와 같이 가서 봐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처음 본 것은 이듬해 겨울 즈음의 군대 내무반에서였다. 배우들의 의상비가 들지 않는 영화들을 선호했던 내무반의 20대 그 혈기왕성했던 군인들도 ‘8월의 크리스마스’ 비디오를 별말 없이 본 다음 서로 깊게 한숨을 쉬며 조용히 불을 끄고 잤던 걸로 기억한다.

그 영화를 본 이후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꿈 하나를 키웠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뛰어넘는 멜로 영화의 시나리오 쓰기였다.

초원사진관에서 발걸음을 돌리며 문득 그 꿈이 떠올랐다. 그 꿈에서부터 너무 멀어져 왔다는 자각도 바로 따라왔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내 깜냥에서만큼은 아직까지 한국의 멜로 영화 중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뛰어넘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기억이 났다면 더 좋았을까?

아직 기회가 있을 거란 상념과 함께 허진호, 박찬욱, 봉준호에 대한 이야기를 종일 나누다 헤어지고 또 전화로도 이어갔던 기억도 불현듯 떠올랐다. 같이 가보자고 했던 그 숱한 말들은 다 허언들이 되었지만 어찌하여 그때의 감정들은 아직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인지.... 


아련함이란 애초 멜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난 뒤에 느끼는 것이 아니라 '멜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이유란 생각은 별달리 위로가 되지 않는 듯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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