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으로 산다는 것 29
'어느새 김광석만큼'

by 월영

아는 선배가 미니홈피 방명록에 “삶이 비루하여 온통 거짓말만 하는 것 같아 글이 안 써진다”고 적어 놨다. “서른 초반에 처자식이 있는 삶이 무어 비루하냐”고 답글을 달았다.


이십 대 후반까지 주변에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서자 주변에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미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흐름에 전혀 동참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내 삶이 더 비루하다고 덧붙였다.


‘유부남이 총각의 자유로운 삶마저 탐내는 건 욕심이다’고 쓰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내 주변의 서른 초반의 인생에 대해 나는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한 삶을 누군가와 함께 살겠다는 결심과 그 결심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 그리고 깊이를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서른이 넘었어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서른의 자격’ 혹은 ‘어른의 자격’에 미달했는지도 모른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는 2000년대 중반 대중음악평론가들이 뽑은 1990년 이후 우리를 흔든 노랫말’ 1위에 오른 곡이다.


9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니면서 선배들 어깨 넘어 포크기타를 배울 때 손쉽게 불렀던 노래가 바로 김광석의 노래였다. 복학했던 형들은 동아리 방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김광석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 모습에 반해 기타를 배웠다. ‘거리에서’ 라던가 ‘변해가네’,‘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나의 노래’,‘일어나’ 등은 대학 시절 나를 위로해주던 노래였다. 군대 가는 형들과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훌쩍거렸다. 짝사랑에 다친 마음을 ‘사랑했지만’으로 달랬다.


하지만 ‘서른 즈음에’는 쉽게 부르지 않았다. 서른이 되어 그 노랫말이 마음에 사무칠 때 불러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서른 이란 나이는 너무나 멀어 보였다. 나에게 서른은 세기가 바뀐 이후의 일이었다.


생전의 김광석 모습을 딱 한 번 봤다. 대학 1학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종로 영풍문고에서였다. 당시 김광석은 청계천 쪽 출구에 있는 부스에 앉아 팬 사인회를 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붐비지는 않았다. 몇 번 주위를 배회하며 김광석의 모습을 봤다. 긴 머리에 눈가에 주름이 보였다. 어느 정도 팬 사인회가 마무리되자 부스에서 나왔다. ‘아. 키가 작은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생각보다 머리가 크구나’ 이런 외향적인 인상이 먼저 강렬하게 다가왔다.


청바지에 체크 무니 남방을 걸치고 있던 김광석은 어색한 듯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서 악수라도 청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가수가 있어야 할 곳은 노래를 부르는 곳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소극장 공연을 하던 그였기에 그곳에서 악수를 청해야지 하면서 뒤돌아섰다. 그해 겨울방학. 학교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도중 버스 라디오에서 김광석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망연한 기분에 잠깐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그의 공연장에 끝내 가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제 이십 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후배는 요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다 보니 센치해진다고 했다. ‘서른 즈음에’ 관한 기사를 보니 ‘정작 서른 즈음보다 20대 초·중반에 더 절실하게 들리는 노래. 훗날 겪게 될 회한과 불안에 대한 담담한 비가’라는 평이 담겨있었다. 해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다시 들어봤다.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게 없네’라는 가사가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가사가 지금의 내 마음의 풍경과 같기 때문이다.


허나 후배는 그 가사보다는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라는 가사가 더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아직 서른을 넘어서지 않아서다. 역설적으로 청춘이 지나는 과정 속에 하루를 보내고 있어서다. 막상 서른이 되어보니 가버린 청춘은 돌이킬 수 없어 체념 할 수 있지만 비어버린 가슴은 채울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로 현실을 더 아프게 한다. 기대는 곧잘 좌절과 한쌍을 이루는 까닭이다.


김광석은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나 1996년 1월 6일까지 살았다. 만 32세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을 했다. 당시 결혼을 했고 남부럽지 않은 집이 있었으며 그리고 어린 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굳이 궁금해하지 않으련다.


다만 김광석은 ‘마흔 즈음에’,‘쉰 즈음에’,‘예순 즈음에’를 부를 수 없지만 누군가가 부를 그 노래를 혹은 우리 스스로 부를 그 노래로 이승의 삶을 연민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안타까운 것은 만약 김광석이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쯤 그의 ‘마흔 즈음에’를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다. ‘서른 즈음에’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까지의 간극을 그는 끝끝내 살아가며 채워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학 1학년 때 봤던 김광석에 대한 내 느낌이 지금 대학 1학년생들이 보는 내 또래에 대한 느낌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어 이십 대 초반의 청춘들과 십여 년 차이가 난다는 현실의 자각. 이제 기타를 잡고 ‘서른 즈음에’를 불러도 겉멋이 아닌 마치 내 이야기 인양 부를 수 있다는 쌉쌀한 만족. 그리고 청춘의 시절에 꿈꾸던 서른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지금의 우리네 삶이 비루하다며 자학하기엔 세월은 또 돌아오리라는 희망.....


이렇듯 그의 노래로 연상되는 여러 가지 상념은 밤을 새워도 이어질 듯싶다. 이럴 때 그의 유작이라 할 수 있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어울린다. 노래의 후렴구는 이렇다.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 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어느새 김광석만큼 살아왔다.


-10년 전에 쓴 글. 이제 김광석보다 10년은 더 살았다. 여전히 삶은 알 수 없고 '사랑했지만'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아니었음을'을 들으며 청승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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