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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Apr 21. 2017

독신으로 산다는 것 30
'당신은 행복한가'

독신 공감

결혼을 앞둔 후배와 점심 먹으며 막걸리 한 잔 했다. 꽃 보러 가는데 맨 정신이 웬 말이냐 해서다. 밥을 먹으며 내가 그의 결혼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걸 강조했다. 덕분이야 란 말을 들었다. 벚꽃 울창한 윤중로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녀석과 걸었다. 남정네 둘이었지만 딱히 부럽지 않았다. 근래 가장 만족스러웠던 점심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떨어져 있던 벚꽃 가지를 주워왔다. 만개한 꽃들이 소복한 가지였다. 옆 자리의 선배에게 드렸다. 생각보다 반기시며 책상 위에다 꽂아 두셨다. 봄은 그렇게 사무실에서도 활짝 폈다.

 

오후에 가야 할 곳이 한 때 주말마다 갔던 정동이었다. 일을 마치고 정동의 수도원 성당에 들렀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가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결혼한 지인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하지만 종내 아무런 생각 없이 살짝 졸았다. 평온이란 단어를 꼭꼭 씹어 되뇌었다. 담담하니 달달했다. 


저녁 빛이 좋았다. 마침 걷기 편한 신발이기도 했다. 오후 여덟 시 약속 시간도 넉넉했다. 슬렁슬렁 걷기 시작했다. 신문로를 거쳐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안국동, 창경궁 끼고 대학로까지 1시간 30여분 동안 걸었다. 걸어가며 인근에서 일하고 있을 친구에게 전화했다. 짧은 통화였지만 반가웠다. 


창경궁 돌담길. 이십 대 마지막 해 숱하게 걷던 길이었다. 그때는 통장에 5만 원도 없었다. 차비를 아끼려고 종로에서 혜화동까지 걸어 다녔다. 미래는 막막했고 능력은 나와 무관한 단어였다. 그런데도 딱히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던 듯하다. 


걷던 중에 가깝지도 않지만 멀지도 않은 사이를 유지하며 티격태격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노부부를 봤다. 휘파람을 불며 걷는 연인이 스쳐 지나갔다. 창경궁 건너 서울대 병원 버스정류장에서는 베레모를 눌러쓴 키 작고 배 나온 할아버지가 자목련 앞에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창경궁 숲 속으로 날아가는 하얀 새의 날갯짓이 우연히 보였다. 아마도 나만 본 풍경이었을 것이다. 아니 나만 기억하는 풍경일 것이다. 


봄밤의 정취가 좋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동네 어귀 한 카페에 앉아 찬찬히 하루를 정리하고 이렇게 몇 자 적는 밤이다. 이 와중에 후배가 전화해서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속상한 마음이 전해져 그저 들어주고 의견을 밝혔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써 놓고 보니 하루의 밀도가 무척 높은 날이었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주절거린 계기는 이 책 때문이었다. 


달라이 라마와 정신과 의사인 하워드 커틀러의 토론을 옮긴 ‘당신은 행복한가’ 


달라이 라마는 하워드 커틀러가 던진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물론이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그 대답을 미루고 대신 오늘 하루를 이렇게 기록한다. 창에 비친 직장인 남자 한 명이 노트북을 켜놓고 후줄근하게 앉아 있지만 어딘가 홀로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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