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어렵고 막막해서 두려운, 그러나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2007년부터 학교에서 수의마취학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이 많이 어려워하고 가르쳐줘도 금방 까먹는 상황을 보고 수의마취학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양한 동물과 다양한 환자가 다양한 질병을 가지고 있는 데, 마취가 필요하다. 일반적인 반려동물병원의 진료에서 접하는 개와 고양이를 비롯하여, 실험동물로 사용하는 마우스 (mouse, 생쥐), 랫 (rat, 큰쥐), 열대지역에서 주로 생활하는 도마뱀, 구렁이, 이구아나와 같은 파충류, 애호가들이 많은 앵무새, 농장동물로 분류되는 닭, 돼지, 소와 함께 경마장이나 승마장에서 볼 수 있는 말까지 마취를 해야하는 동물은 종류를 헤아릴 수가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동물과 어린 동물에서부터 나이든 동물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런 동물들이 건강하고 다른 이상이 없는 상태에서 마취를 하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동물들이 다치거나 밥을 먹지 않아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즉 질환이 있는 상태에서 마취를 하는 것은 위험도가 더 올라가게 된다. 이런 질환이 있는 동물의 영상진단이나, 내시경 및 외과적 치료를 실시하기 위하여 마취를 해야만 한다. 왜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동물들은 사람처럼 '숨을 참으세요', '잠시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를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픈 치료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자신에게 아픈 자극을 주는 '털없는 원숭이'를 적으로 간주하여 적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적과 싸우서 해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2. 동시에 많은 지식을 사용한다. 건강한 동물의 정상 상태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해부학과 생리학, 질병이 어떻게 생기는지 이해하기 위하여 병리학, 치료와 마취를 위하여 많은 약제를 사용하므로 약리학, 신체검사와 진단을 위하여 내과학, 임상병리학, 영상진단학, 궁극적인 치료를 위하여 외과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마취제는 심장과 혈관계통의 기능을 저하시키므로, 마취 중에는 정상적인 상태와 유사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의 각각이 동물의 정상범위를 알아야 한다. 심박수, 호흡수, 체온을 생체활력징후라고 하고 기본적으로 확인한다. 그런데 여러가지 동물종 (species)의 정상범위가 다르고, 심지아 같은 개라고 해도 아프칸하운드와 같은 큰 개들과 시쭈와 같은 작은 개들의 정상범위가 다르다. 따라서 정상범위를 알고 심박수가 너무 빠른지 (빈맥, tachycardia), 너무 느린지 (서맥, bradycardia)를 판단하여 정상범위로 돌아오도록 마취깊이를 조절하거나, 약제를 이용하여 심박수를 조정하여야 한다.
또한 질환이 동반되면 여러가지 변화가 추가되고,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마취를 하여야 하므로 동시에 생각할 것이 많아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은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치료를 위하여 약제를 선택하여 용량을 조정하여 투여하게 된다. 이 때는 치료를 실시하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 예상되는 통증의 정도를 고려하여야 하며, 적절하게 선택하여 투여되지 않으면 마취 중에 환자가 통증을 느끼게 되거나 움직일 수 있다.
3. 동시에 많은 기계와 장비를 사용한다. 마취 과정에서는 기본적으로 호흡마취에 필요한 마취기, 인공호흡기, 마취감시기, 수액펌프 등의 장비를 사용한다. 당연히 각 기계와 장비의 작동방법과 장단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제조회사가 다양한 마취기를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비슷하다. 자동차가 엔진과 차체를 포함한 기본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운전면허를 한 번만 취득하면 대부분의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대부분의 마취기도 사용할 수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마취기에 인공호흡기가 붙어 있으며, 마취감시기와 수액펌프도 기본원리는 비슷하므로, 옵션으로 붙어 있는 항목들이 다를 뿐이다. 비싼 것일수록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편리한 활용이 가능하다. 구매에 들어가는 비용과 활용도를 고려하여 선택하면 된다.
4. 마취를 실시할 때는 정답이 아닌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다. 임상의 모든 과정에서와 같이 정답은 없다. 다만 최고의 선택을 하여 최선을 다할 뿐이다. 동물의 행동이나 약물에 대한 개체의 반응은 1+1=2처럼 간단하게 계산할 수 없다. 모든 개체가 다른게 반응한다. 그러한 반응을 예측하고, 준비물을 준비하며,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을 때는 '당황하기 않고' 냉정한 판단으로 적절한 처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5. 자신만의 판단이 필요하지만, 아는 것이 없어 어렵다. 그렇지만 재미있다. 마취를 하다보면 수술실에 마취통증의학과 구성원들이 다른 일로 사라지고 혼자만 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러면, 등골이 서늘해지고 갑자기 심박수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혼자만의 시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마취기록지에 5분마다 생체징후 자료를 적어가면서 혼자서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어느덧 마취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무사히 마쳤구나! 오호~! 의외로 재미있네.
6. 혼자서 빨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없으니 마취의에게 의뢰한다. 마취과정은 빠른 시간 내에 마취가 도입되고 기관내삽관을 진행하고, 마취기에 연결하고, 인공호흡기를 켜고, 마취감시 장치를 연결하면서 수술을 위한 준비과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혼자서 빨리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른다고 가만히 있으면 환자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모르면 물어본다. 그리고 다시 확인하고 진행한다.
7. 경험이 없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할까 두렵다. 따라서 긴장한다. 마취과정에서는 경험이 없으면 당췌 어떤 일이 발생할 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두렵다. 두려우니 긴장하게 된다. 그렇게 마취를 한 번 하고 나면 진땀이 난다. 순간에는 무지하게 길던 시간도 마치고 나면 마취기록지 한 장으로 마무리된다.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근육통이 며칠간 유지된다.
8.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모르니 답답하다. 마취과정에 문제가 생겨서 급히 선배에게 얘기하면 선배는 덤덤하게 천천히 (내가 보기에는) 슬로우 모션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지 알 수가 없고, 모르니 판단할 수 없고 상응하는 처치를 할 수 없다. 나만 답답한건가 혼자서 생각하게 된다.
9. 마취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나도 그런 말은 할 수 있다. 여러가지 동물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때문에 같은 작업이라도 모든 동물에게서 똑 같이 할 수가 없다. 어려운 시도를 할 때 '마취만 되면 딱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취가 되면 힘들게 진행하는 일들도 쉽게 진행할 수 있고 환자도 스트레스를 적게 받게 된다. 물론 수의사도 스트레스를 적게 받게 된다. 선배가 기분이 좋아지니까. 교수님도 웃으시니까.
10. 생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위험하더라도 잘만 하면 생명을 살 릴 수 있다. 그러나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다. 위험한 상태에서 마취를 해야하는 경우에는 고민이 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마취를 하지 않고 놔둔다면 환자는 죽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위험하더라도 마취를 진행해야 한다.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으니까. 현재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현재 상태를 마취 상태에서도 유지하면 처치를 마칠 때까지, 그리고 마치고나서도 살아있을 수 있다. 그러면 사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도조차 하지 않고 죽게 놔두는 것은 근무태만, 직무유기이다.
11. 그러니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워서 자신 있게 하지 못한다. 덩달아 손이 떨린다. 누구나 처음에 해보는 일에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보고 듣고 한 내용을 바탕으로 옆에서 지도해주시는 분의 가이드를 따라 진행하면 어느 순간 득도하는 순간이 온다. 그래 바로 이거야. 유독 긴장하면 손이 많이 떨리는 친구들이 있다. 알코올성 수전증이 아니냐고 농당을 하기도 하지만, 당사자는 그 말에 더 긴장하게 되고 힘들다. 자신이 생기는 순간 손떨림도 멈추게 된다.
12. 마취를 하면 한꺼번에 보고 확인해야 할 수치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 환자, 마취기, 모니터, 인공호흡기, 수액 펌프에 보이는 숫자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어서 5분마다 마취기록지에 적는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순간순간의 결과와 숫자들을 다 기억할 수 없다. 그러니 적는다. 더군다가 하루에 여러 환자들을 마취하다보면 정보가 뒤섞이게 된다. 그러니 적는다. 경험이 쌓이다 보면 그 순간순간의 숫자를 기억하지 않고 경향을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면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13. 공부를 잘해도 소용이 없다. 책으로만은 되지 않는다. 실습을 통하여 연습하고 실제 환자 마취를 잘해야 한다. 마취는 책으로 읽고 실습을 해봤다고 하더라도 실제 환자를 다루게 되면 누구나 긴장하게 된다. 책으로 읽은 내용을 동영상으로 아무리 반복해서 봤어도 내 손은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수 많은 반복이 쌓여서 자연스럽게 진행하게 될 때쯤 나도 모르게 흐믓한 미소를 짓게 된다.
14. 마취는 센스다 (심 여사 어록). 순발력, 판단력, 기본 지식, 손끝 감도가 필요하다. 수술방에 있는 간호사가 마취통증의학과 수의사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센스있는 사람이 마취를 잘 한단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15. 마취는 미지의 세계와 같아서 평생 공부해야 한다. 매일매일 바뀌는 의학정보와 증례보고들을 보고 배우며 하루하루 나아가지 않으면,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뒤쳐지게 된다. 우물안 개구리 신세다. 늘 안테나를 세우고 새로운 정보를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신우일신 해야 한다.
16. 간단한 수술은 있어도 간단한 마취는 없다. 2023.05.19. 마취통증의학과 아침 미팅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