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한 때 만난 책
전쟁 9일 만에 그들(우크라이나를 나치즘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정화하기 위해 침공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은 나를 집, 엄마,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해방’ 시켜 주었다.
나에게 남은 건 아이들, 강아지, 등 뒤의 백팩 하나와 그림 그릴 수 있는 재능뿐이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그림작가 ‘올가 그레벤니크’가 8일간의 지하실 생활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 탈출하기까지의 피난 과정을 그림과 글로 쓴 17일간의 기록이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는 항상 앞으로의 15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살아왔다.
하지만 때론 상황들이 우리보다 강할 때가 있다.
아파트 노후화로 우리집 화장실 온수관 쪽에 누수가 발생해 아랫집에 물난리가 났다. 누수 탐지를 꼼꼼히 한 결과 우리집 화장실 전면 공사가 불가피해진 거다. 보험을 안 들어 놓은 탓에 큰돈이 들어가게 됐지만 남편과 내 생일 즈음에 일어난 일이라 새 화장실을 선물로 받게 생겼다고 눈물 흘리며 웃었다. 그리고 공사가 시작된 날에야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전쟁 첫째 날 내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팔에도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무서운 사실이지만 그 생각으로 미리 적어두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섭고 두렵고 참담한 순간에도 엄마는 참 강하구나 싶었다. 잘못되면 시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인데 표식이라도 찾으면 헛고생도 없을 테니… 나도 이런 상황에 닥치면 똑같이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떠한 전쟁도 일어나면 안 되는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다.
내 안에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이미 선택했고, 이젠 그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바로 곁에 내 아이들이 있었다.
올가는 집을 떠나며 엄마와 이별하고, 국경을 넘어가며 우크라이나 계엄령에 의해 고국을 떠날 수 없는 남편과도 헤어진다. 나는 현재 내 상황도 곧 지나갈 거라는 희망을 안고 엄마와 일상적인 통화를 했다. 내 생일 즈음엔 꼭 엄마랑 둘이서 맛난 식사를 했는데 이번엔 집 사정으로 못하게 됐다고, 다 정리되면 시어머니랑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남편과 아들이랑 공유하는 단톡방에는 전보다 더 서로를 격려하는 애정 어린 농담들로 가득 찼다. 남의 불행을 보며 위로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올가네가 부디 잘 지내고 있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사람을 민족 소속으로 나누지 않는다.
민족이 아닌 행동이 사람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많은 러시아인들도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