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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나물 Jul 31. 2024

이 나이 먹고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번아웃: 공백 없는 세상


   한국은 번아웃의 기준이 한참 높다. 왜냐면 다들 과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과로하는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본 글 중에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한국 사회가 사람들에게 어떠한 공백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내가 이 글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최근 들어 나에게 청년 히키코모리(한국어로 은둔형 외톨이라고도 표현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맞는지 모르겠다.)와 쓰레기집에 대한 기사나 영상 등이 자주 뜨기 때문이다. 현재 그런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 중에서도 몇몇은 작게나마 공백기가 생겨버리면 그 시간의 정당성을 설명할 변명거리를 찾다가 방으로 숨어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공백기가 아니더라도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아무도 모르게 잠식해 가는 상황도 가끔 생기고 있다. 공백기는 말 그대로 공백기인데, 가만히 비워 두지 않고 그동안 뭐 했냐는 주변의 질문이 당연한 것을 보면 공감이 가기도 한다. 나조차도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번아웃에 내몰려 하루하루 꽉 채워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제대로 쉬는 날이 정말로 필요한데도 그 쉬는 날에 뭘 해야 할지도 고민하고 계획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아웃에 관련된 ‘요즘애들’이라는 미국작가의 밀레니얼 사례연구 비슷한 책을 읽었는데, 나는 그걸 읽으면서 ‘이게 무슨 번아웃이야. 완전 꿀 빠는 구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장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좋은 대학을 나오고, 뛰어난 어학능력과 사무능력, 다양한 자격증과 우수한 학점, 훌륭한 기관에서의 인턴 등을 함으로써 취직에 성공하는 것, 소위 말해 ‘성공적인 삶’이라는 포장지를 위해서 필요한 자질들은 마치 기본값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영위하고 쟁취할 수 있는 이는 매우 소수이다. 애초에 수험생시절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성적은 백분율에서 후하게 잡아도 상위 8% 이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포장지’를 성취해 내기까지도 끝없는 경쟁과 엉덩이 싸움, 그리고 호감형 용모를 갖추는 데에 열을 냈다면, 번듯한 직장이 생기고 나면 잘 쉬고, 규칙적인 운동과 자기 계발을 해나가야 한다는 강박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청년들은 잠을 아껴가며, 건강을 깎아가며 자신이 얼마나 야무진 어른이 되어가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니 돈 모으기, 현금만 쓰기, 부업, 투잡 그리고 미라클 모닝까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피곤해지고 있다. 근데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를 감싼 것은 포장지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런 포장지 중에서도 가장 청년들이 많이 신경 쓰는 것은 SNS에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처음 취직을 하고 바꾼 명품 지갑, 돈을 모아서 산 명품 가방이나 혹은 휴가지에 가서 즐기고 운동을 하며 관리하는 ‘나’의 모습. 나 또한 SNS의 굴레에서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원체 남의 인생에 관심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인스타그램 글은 보지 않았지만, 내 인스타그램 글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삭제하곤 했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모두 피곤하게 느껴졌다.


예약지옥

‘예약지옥’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그렇게 명명하고 싶다. 나는 그냥 쉬는 날 정처 없이 떠돌다가 미술관도 가 보고, 맛있어 보이는 식당에도 가고 싶다. 요즘에는 가고 싶은 전시가 있어도 예약, 예매를 해야 하고, 식당도 예약해서 가는 느낌으로 점점 바뀌고 있다. 심지어는 내 돈 1000만 원을 갖고 가방을 사겠다는데 오픈런이니 뭐니 하면서 기다려도 재고가 없어서 못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애초에 돈이 없으니 한국에서 명품매장에 가본 적이 없지만, 가끔 미국에서 여행 중에 시간이 떠서 궁금한 마음에 샤넬 매장에 들어가면 그냥 서랍을 드르륵 열면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22백, 19백이 색깔별, 크기별로 좌라락 있고 클래식백이 크기별로 색깔별로 다 있다. 사람들이 없어서 못 산다는 건 내가 모르는 뭔가 특별한 샤넬백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매장에 들어갈 때도 대기 없이 그냥 쓱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올 수 있었다. 휴가를 가려고 해도 휴양지 숙소 싸움, 자리싸움, 꼭 가야 하는 식당 예약싸움.. 제주도에 유명하다는 흑돼지집은 예약을 못해서 못 가본 곳이 꽤 된다. 나는 휴가를 갈 땐 정말 쉬고 싶다. SNS에 올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드라이브를 하다가 검색해 보고 맛있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고, 핫한 숙소는 아니더라도 쾌적하고 시원한 숙소에서 푹 자고 일어나는 방향으로 쉬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뒷북일 거 굳이 트렌드를 따라가고 싶지 않다.



꼭 뭔가를 하는 중이어야 하나?


성별도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바뀐다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마치 열심히 일을 하고 나서 은퇴를 하고 나면 본인의 쓸모가 사라졌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네 부모님 세대처럼, 우리도 이 사회에서의 톱니바퀴로서 공백기가 생기면 금방이라도 녹슬까 봐, 나는 놀고 있지 않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보여주려고 한다. 얼마 전 대학생이 휴학할 때 해야 하는 것 리스트를 봤다. 꽤나 빽빽한 그 리스트엔 유럽여행, 어학점수, 자격증 준비, 인턴 하기, 새로운 언어 배우기 등등 정말 많은 것들이 있었다. 대학교는 휴학하면 기껏해야 1년 아닌가 싶은데, 그 기간을 의미 없이 보내면 결국 이후의 시간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며 지낼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20대 초반, 중반에 시기에 충분히 노력해서 인생을 바꿀 수 있었지만 내가 나이가 들고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붙잡혀서 전공을 바꾼다거나, 편입 준비를 한다거나 하는 등의 도전을 최대한 억누르고 먼저 취직 준비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불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젊음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가져본 것이 젊음이고 누구나 지나온 것이 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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