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나물 Jul 05. 2024

비 오는 날 아빠 생각

엄마아빠가 예쁜 그릇에 밥 해 먹었으면 좋겠어.


아빠의 마음


  아빠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기까지 꼬박 몇십 년이 걸린 걸까. 내 어린 시절이 기억하는 아빠는 고된 출퇴근에 집에서 뻗어 코를 골고, 어쩔 땐 꼰대같이 굴고, 젊은 세대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빠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에 생각하다가 초등학생 때인가, “나 그럼 나중에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 버린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니까. 내 편이 되어 줄줄 알았던 엄마는 그 당시에 “아빠 같은 사람 만나면 너한테 좋은 거지. ”라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백번 맞는 말이다. 아빠는 엄마와 우리 자매가 외출준비를 하고 있으면 10분 먼저 차로 가서 겨울에는 차를 데워놓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 놓으셨다. 비가 오는 날에는 혼자서 비를 맞고 차로 가 우리가 비 한 방울 안 맞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에 대해 알게 된 건 결혼하고 나서였다. 내 남편은 비가 오면 “하나, 둘 , 셋, 뛰어!”하며  나랑 같이 차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장마철 동안 몇 번을 흠뻑 젖어 차에 타니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부모님이 어떻게 이 인생을 살아오신 건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 아빠도 이런 일들을 이겨내고 매일매일 출근을 하셨던 건가?’

‘ 엄마는 어떻게 출근준비 하면서 내 도시락을 아침에 어떻게 챙겨준 거지? ’


  나는 20대 후반이 되도록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잘 안되고, 아직 아이도 없는데, 엄마, 아빠는 이 나이대에 얼마나 강했던 걸까? 아마 똑같은 청년이었을 거다. 내가 대학생 시절 몇 개월 간 인턴을 할 때 6시에 일어나서 출근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정말 힘들고 지쳤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30년 동안 같은 회사에 매일 5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IMF를 겪을 때도 지방에서 영업을 하면서 버텨내셨다. 연차도 거의 쓰지 않으셔서 퇴직하기 전에 지금까지 밀린 연차를 몰아서 냈는데도 한참이나 남아 회사에서 상품권 같은 형태로 돌려줬던 기억이 난다. 일이 바빠져서 주말에 출근하실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가족 여름휴가에 아빠 없이 갔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 셨기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대학교 때까지 내 졸업식에서도 보기 어려웠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나에게는 서운한 마음으로 남아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오신 우리 엄마아빠, 우리 아빠는 장난스레 돈이 없다며 찡얼거리기도 했지만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일 때마다 항상 나에게 해주던 말이 있다.  


“딸아, 공부하는 거 힘들면 언제든 자퇴해도 돼. 아빠가 너랑 같이 먹고살 수 있게 평생 일 할게. ”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냐고?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 나는 인싸였다. 매 학년 첫 시험에서 내가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알았기에 아빠가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이건 아빠의 애정표현이었던 거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느라 함께하지 못하는 아빠가 딸에게 할 수 있는 변명이자, 최고의 애정표현인 것이다. 정작 본인은 언제 회사를 나가게 될지, 언제까지 자기보다 어린 상사를 모셔야 하는 건지 스트레스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딸의 인생만큼은 고생 없이 달콤하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인 것이다.


  이 말은 내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결혼하고 미국에 가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들고 포기하고 싶을 땐 언제든 그만두고 오라고, 내가 하고 싶지 않으면 고민 말고 아빠에게 오라는 말이 항상 나에게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줬다. 실제로 내가 무언가를 그만두거나, 실패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 나는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으며, 실패해도 나는 다른 것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실제로 내가 포기해도 바뀌는 건 크게 없으니까. 포기한 적은 없지만, 그게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하는 중요한 키였다. 나도 부모님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퇴직하시고 열심히 봉사하는 우리 아빠,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게 어려워 많이 힘들다고 하셨었다. 어려운 게 있다면 언제든 나에게 물어볼 수 있기를, 지금은 내가 엄마, 아빠를 책임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부모님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그런 듬직한 딸이 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플로리다의 작은 과일가게 이야기: 로버트는 여기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