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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Jan 05. 2020

당신의 영어나이는 몇살인가요?

제 영어나이는 시방 7년 1개월이올시다.

  한국에서의 나의 영어스펙은 그리 좋지도 형편없지도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그나마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영어였고 과외의 도움 없이도 수능 영어시험정도는 거의 만점을 받거나 한두개 틀리는 정도여서 스스로는 꽤 영어를 잘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복수전공으로 하다가 셰익스피어에서 좌절하면서 근자감이었음으로 판명됐다. 그 후로도 먹고대학생 생활을 영위하다 90년대 중반 학번에서 꽤 흔했던 어학연수 경험 한번 없이 결혼과 직장생활을 이어가면서 점차 영어에 대한 흥미과 자신감은 흐릿해져갔다.

 결혼 6년차쯤에 독립이민에 의한 영주권을 받고 나서 캐나다 이민을 진지하게 계획했을 때에도 내 특유의 게으름으로 인해 영어공부에 대한 별도의 노력은 하지 않았고 나는 재미와 영어학습의 두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밤새 미드 '위기의 주부들'을 정주행하곤 했다.


 십년전 캐나다 이민을 막 왔을때 나의 영어실력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Can you close the door,please?"와 같은 기본적인 문장도 머리속에서 미리 생각해야지만 입으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주로 이민자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워크비자를 포함한 이른바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상영어교육를 제공한다. 저소득자로 나라의 세금을 축내는걸 놔두기 보다는 돈을 들여 영어공부를 시켜서라도 영알못들의 납세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이다. 나또한 당연히 랜딩하자마자 ELSA라고 불리는 (지금은 LINC로 이름이 바뀌었다) 반편성을 위해 레벨테스트를 받았다. 게중 기억에 남는 문제가 사진을 보여주고 영어로 묘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더듬더듬 의식의 흐름대로 완성된 문장이 아닌 단어와 구의 나열을 했다. 부끄러움은 없었다. 어짜피 이건 공짜 영어수업의 반을 편성하기 위한 과정이니 굳이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결과는 예상외였다. 무료교육을 제공하는 레벨이 1에서 5까지라고 하면 내 영어실력은 6정도이기 때문에 무료교육 대상자라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역시.. 내가 영어에 소질이 있기는 한가봐..하고 근 십년만에 어깨가 으쓱해졌다가 금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공짜 서비스는 절대 허투로 제공되지 않는다. 테스트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이 정도의 영어실력이면 어디가서 기본적인 돈벌이는 가능한 수준이니 영어공부는 알아서 하라는 거지 절대 당신의 영어실력은 훌륭하다라는 칭찬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건 희망적인 메시지였다. 내가 눈덩이를 굴리기로 했는데 아무것도 없는것보다는 작은 뭉치라도 만들어져 있어야 굴려지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면 채점관이 나의 레벨을 6이상으로 평가한 것은 '잘하려고 애쓰거나 못한다고 주눅 들어있지 않은 뻔뻔함'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무료 영어 교육 대상자가 아니다(당신 정도 영어 실력이면 밥벌이는 가능해요)라는 말은 단지 나의 어휘력과 문장구사력만 가지고 나오는 평가가 아닌 나 자신의 영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까지 감안한 종합점수였던 것 같다.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나는 십년전 내 영어나이를 만 4세로 잡았다. 물론 한국인에게 유리한 읽기영역은 제외하고 오로지 말하기 듣기 쓰기의 3대 영역만을 놓고 평가했을때 여기 4세 아동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그 4세 아동의 부모와 말이 그만큼 통할지는 미지수이다.) 그 시기의 아이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되는 대로 말을 한다.

 

 그러나 영어권 국가에서 10년을 살았든 20년을 살았든, 이미 언어회로가 굳어진 나이의 거주기간은 영어실력 향상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 갓 이민을 온 사람도,이민생활이 30년이 넘어가는 선배님들도 가장 넘기 힘든 장벽은 언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영어가 늘지 않는 것도 서러운데 슬프게도 모국어 실력까지 녹슬어간다. 그래서 영어,한국어 둘다 안돼요..라는 슬픈 고백을 자주 듣곤 한다.


   그렇다면 이민 십년차.. 내 영어나이는 몇살인가? 내 생각에는 이제 겨우 7세정도 수준인 것 같다.

여기에서 태어난 아이가 4세 정도의 시기에 폭발적으로 언어를 습득하는 동안 내 머리속의 언어영역은 아주 잠잠하고 고요했다. 그나마 이민 1~2년동안에 영어나이를 1살 정도 더 먹은 것이 가장 가파른 성장세였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대다수의 이민자들이 겪는 '이민초기버프'현상같은 것일게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의 영어나이 성장 곡선은 너무나 완만해서 그 후 7~8년의 세월 동안 관대하게 봐도 고작 2살 정도를 더 먹은 게 전부였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화두인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하는 것, 영어를 마스터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나에겐 실체없는 이상에 불과하다. 애초에 영어공부의 목표를 '원어민수준' 으로 잡는 것은 목표지점이 불확실하기도 하거니와 평범한 인간인 내게 성취감 보다는 좌절감을 더 많이 안겨줄 것이다.


  지금처럼 80% 한국말을 쓰는 직장을 다니고, 한국 교회를 나가고, 한국 커뮤니티 안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30년 후에도 내 영어나이는 한 살도 못 먹었던지 아니면 퇴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굳이 영어를 잘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면 굳이 불편하게 인위적인 영어환경을 조성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왜 많은 이민자들이 영어 앞에서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고백을 할까?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보면 분명히 영어로 인한 불이익과 망신과 불편함을 겪을 일이 생긴다. 새치기를 당하고도 싸가지없는 백인아줌마의 말빨에 눌려 어버버거리다가 몰려오는 현타나, 점점 영어가 더 편해지는 자녀들과 겪게 되는 심리적 단절이라든지,또는 정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지만 내가 속한 한국 커뮤니티에 대한 환멸이 생겨 벗어나고 싶은데 언어로 인해 벗어날 엄두가 안나는 데서 오는 좌절감 등이다.

 그러한 문제는 단순히 내가 레스토랑에 문제없이 예약을 하고 능숙하게 메뉴를 골라 주문하고 세련되게 계산을 할 수 있는 정도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뭔가 더 근본적이고 깊은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 뿐만이 아닌 내가 이민생활 20년이 넘는데 아직도 영어가 제자리구나 라는 허탈과 자기실망이 불러오는 자아효능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어에 대한 나의 목표란, 그리 원대하지 않다. 그저 나의 생체 나이가 진행되는 동안 영어나이도 거북이처럼 느리게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따위가 내 자존감을 갉아먹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영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간단하다. 어제 몰랐던 영어 표현을 오늘 할 수 있게 되다면 반나절만큼 나이를 먹은 것이다. 어제는 없었던 실날같은 자신감이라도 오늘 생기면 하루치 먹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날들이 연속해서 쌓이지 않는다면 영어 나이를 먹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한때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내 아이와 그의 친구들에게 유행하는 단어가 있었다. '어짜피' 라는 단어였다.

아이들은 어쩌다 알게된 이 생소한 단어를 쓰는 것에 아주 적극적이다 못해 막 남용을 했다. "엄마 나 어짜피 장난감 사고싶어" "엄마 나 어짜피 TV 볼거야 "등등의 부적절한 단어사용이 너무나 귀여웠더랬다. 그러다 아이들은 몇달 지나지 않아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짜피'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제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의 언어는 세련되어져 갔다. 나는 이러한 경험과 과정이 나에게도 생기기를 바란다.

 

  나는 십년 동안 내 영어나이를 키우는 것을 게을리 한 것에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그래도 그사이 4세에서 7세로 성장한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나이 7살짜리가 영어에 대한 칼럼을 쓴다는 것은 결코 어불성설이 아니다. 내 글의 목적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내 비슷한 또래의 영어연령들과 나의 성장기록을 공유하고 공감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더디지만 꾸준히 성장하기로 결심했고 일곱살에서 여덟살,아홉살,열살이 되는동안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나의 영어나이는 과연 몇살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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