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egevora Jan 31. 2020

이민 전의 준비 운동

들숨에 건강을 날숨에 평화를  

이민.

이 얼마나 설레이고도 무거운 단어인가. 

태어나고 자란곳에서 그동안 일구어놓은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보통 이민자 3명 중 한명은 3년 안에 이민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한명은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정착에 성공하고 나머지 한 명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산다는 말이 있다. 즉 3년 정도가 이곳에서 앞으로 살 수 있겠다 또는 못살겠다라는 감이 오는, 성공적인 정착에 중요한 시기라는 셈이다.

 

 나의 시행착오를 돌이켜보며 초기 정착률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현재 이민을 계획하거나 준비중인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이민이라는 격한 운동을 시작하기 전 부상을 방지하고 좋은 운동 효과를 거두기 위한 간단한 호흡법 또는 가벼운 준비 체조격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1. 한집에 가장은 두 명, 주부도 두 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도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장이 열심히 식구들을 먹여살리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는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이민을 가면 가족 구성원의 전통적인 의무는 더더욱 잊는 것이 좋다. 가족의 생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부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사와 육아 역시 부부 공동의 책임이다. 엄마가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버는 동안 아빠가 아이들을 학교에서 픽업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무도 저 집아빠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남자가 대낮에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것이 전혀 이상한 광경이 아니다. 

   나는 대학생때도 안해봤던 패스트푸드점 알바를 서른 중반에 캐나다에서 해보았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많은 여염집 처자들이 식당에서 마트에서 공장에서 일한다. 저마다 가계에 큰 보탬이 되는 어엿하고 유능한 여인들이다. 내가 평소에 '유슬림'이라고 놀리는 내 남편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던 상꼰대 였다. 그런 그도 이민생활 중 느끼는 바가 있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인지 자꾸만 집안일이 재밌고 적성에 맞는다고 한다. 나는 안다. 그가 정말로 재밌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바깥일에 지쳐서 나오는 이야기임을. 그리고 집안일이 그에게 뜻밖의 도피처가 되어줌을 그나마 감사하게 생각한다.

 남자가 가장으로서 바로서고 여자는 알뜰살뜰 살림을 하는게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저마다 실패한 이민가정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우리의 남편들은 천하무적이 아니고 나이들수록 약해지며 특히 낯선땅에서는 더더욱 초라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약해지고 초라함을 식구들에게 티내지 못하고 강한 척하며 사는 것이다. 이민이라 함은 어쩌면 서로의 약함과 찌질함을 커밍아웃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아닐까. 

            


2. 최저의 생활비로 사는 연습을 해본다. 

 이민생활이 화투판이라고 가정하고 화투를 치는 목적이 돈을 많이 따기 위함이 아닌 가능한 오래 게임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실력이 비슷한 선수 둘 중 판돈이 큰 사람이 당연히 오래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판돈이 고만고만하다면? 크게 따지는 못해도 적게 잃는 사람이 오랫동안 화투를 칠 수가 있다. 

 우리는 약 3년 정도 버티겠다 싶을 만큼의 정착자금을 가지고 이 곳에 왔다. 그러나 북미에서도 물가가 높은 편인 이 곳에서 은행잔고의 하향 곡선은 예상보다 가파랐다. 은행잔고의 자리수가 바뀔 무렵, 남편은 대상포진을 심하게 앓았다. 칼로 살이 포뜨임 당하는 느낌이라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는 순간 마음은 초조해졌고  우리는 이민생활이라는 고스톱을 치면서 빠른 속도로 잃기만 했던 것이다. 잔고의 하향곡선이 조금 더 완만했더라면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더 많은 경험과 공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위 곶감 빼먹듯이 까먹는 돈은 우리가 주경야독을 한다면 까먹는 돈이 아닌 나와 내 가족의 미래에 대한 투자금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건데, 판돈이 축나는 속도 외에도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은 소비에 대한 욕구였다. 빨리 돈을 벌어서 집을 넓혀 가고 소소하게 돈쓰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다.그래서인지 우리는 젊고 아이들은 귀여웠지만 생활은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적은 생활비로 사는 것에 익숙했다면 우리 부부는 더 많이 웃고 사랑하고 아이들과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항상 근심했던 이유는 돈을 조금 벌어도 된다는 마음의 평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3. 직업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요즘 N잡러가 큰 화두이다. 이제 '평생직장'이란 단어는 거의 소멸된 것 처럼 본업 하나에만 올인하는 시대는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 하지만 10년전 우리는 구식스러운 발상으로 생계를 위해 뭔가 '굵직한 거' 하나가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일년 동안은 탐색기간으로 이것저것 기회가 되는대로 시도해보았는데 모두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굵은거'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적지 않은 자본을 들였으나 결국 허무하게 '無'로 돌아갔다.

처음에 자잘한거 대여섯개를 하다보면 그 대여섯개가 모여서 어쩌면 굵직한 거 하나의 성과를 낼 수도 있었고  그 중 한두개는 잘 안되서 없어진다 쳐도 별로 당황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여러 자잘한 것 중 하나가 의외로 커질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뚜렷한 직업'이라는 단어에 연연해 하지 말자. 낯선 땅에서 일하는 것은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다양한 경험은 나의 시야를 넓혀주고 넓어진 시야 만큼 보이는 직업의 기회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4. 캐나다 생활이 주는 이점을 누릴 준비를 하자. 

 그대는 캐나다 라이프에 대한 동경의 이미지가 있는가? 

여름날 공원에서의 바베큐, 캠핑장에서의 별 헤는 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반려견과 함께 하는 아침 산책, 마당있는 집에서 가꾸는 텃밭, 스키나 스케이트와 같은 겨울스포츠의 나라 등등 사실 더 나열하고 싶지만 당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암튼 이 아름다운 활동들은 여기서 아둥바둥 비싼 세금 내고 사는 내게 주는 이 나라의 선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이 중에 누리는 것이 거의 없다. 운동하고는 애초에 담을 쌓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에도 무덤덤한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생활에 200% 만족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즐거운 취미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시기와 질투에 휩싸인다. 자연을 즐기고 취미생활을 영위해 나가는게 큰 돈이 들거나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나는 못할까? 똑같은 돈 내고 부페를 가서는 어떤 이는 갈비랑 킹크랩으로 배를 채우는 동안 나는 볶음밥만 먹고 있는 듯한, 뭔가 손해보는 느낌이랄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캐나다에서 하면 즐거울 일을 미리 계획해보자.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삶을 고달프게 여기지 않고 여기 온 것에 대해 축복받았다고 느껴질 만큼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5. 이민과 동시에 어학연수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자. 

 나름 북미에 산다고 하나, 맘만 먹으면 영어 한마디 안하는 날이 허다하다. 특히나 내가 사는 이곳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는 더 그렇다. 한국직장, 한국마트,한국교회,한국식당.... 영어를 못해도, 안해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못해도 지장없는 영어를 잘하고 싶어한다. 영어를 하면 내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를 안해도 생존에 별로 지장이 없으니 점점 안하고 싶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민자 부부들을 보면 영어실력이 어느 한 사람에게 편중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개인의 언어 능력차이도 있겠지만 영어에 자신없는 사람이 배우자에게 의존하면서 생기는 이른바 '영어몰빵현상'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언어습득능력은 만 12세까지라는데 이렇게 몰빵을 당해 울며겨자먹기로 생존영어를 해버릇 한 사람은 영어때문에 쪽팔리기 싫어서 회피한 사람보다 시간이 가면서 영어 실력이 훨씬 좋아진다. 우리가 서른,마흔 넘어 이민을 온 것이 아니라 나이 먹어 어학연수를 왔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억지로라도 영어를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영어 한마디 안하고 보낸 하루가 아까울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걸려온 귀챦고 알아듣기 힘든 설문조사전화에도 끝까지 버벅대며 응답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나에게는 공짜 전화영어수업이니깐.



 성공적인 이민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분명한 것은 부를 축적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만약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중국이나 베트남에 가거나 그냥 한국에서 머무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다. 저마다 비슷비슷한 이민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고 좀 더 가족중심적인 여유로운 삶이 목적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두가지 꿈은 이루어졌다. 한국학생에 비해 여기 아이들이 훨씬 학업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고 우리 식구들은 지겹도록 같이 붙어 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참으로 많이 고생하고 내려놓았다. 그동안 고생해서 얻은 것이 고작 이건가 싶을 만큼. 아무래도 이익보다는 손실에 민감한 우리 중생들의 특성상 본전생각 안나고 이민 잘 왔다 소리가 나오려면 내가 애초에 원하던 바 외에 무언가를 더 얻어야 하나보다.


 때문에 나는 감히 성공적인 이민생활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한때 꿈꿨던 캐나다 이민에 대한 오만정이 뚝 떨어진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괜챦다. 캐나다 라이프가 안맞는 사람도 많다. 여하튼 내 삶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고 다만 이민 초창기에 정착의 성공확률을 높이는 이야기는 이제 겨우 입에 담을 수 있는 정도이다. 이민자의 삶이라는 힘든 마라톤을 앞두고 깊은 복식호흡을 하고 다리에 쥐가 안나도록 근육을 잘 풀어놓는다면 캐나다 그까이꺼 살만하네..라고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캐나다 사교육에 대한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