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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Dec 07. 2020

나의 십자가

예민하고 병약한 미남아재(?)와 사는 법.

 괜찮으시다면 남편 찬가로 조금 재수없게 시작해 보겠다.


 우리 남편은 아이큐가 멘사회원급의 정말 똑똑한 사람으로써 사립국민학교로 시작해 강남 8학군에서 명문대석사 졸업까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재원이다.

 출중한 외모는 또 어떤가? 180cm에 조금 못 미치는 준수한 키에 40대 중반에도 상위 1%안에 드는 헤어라인과 머리숱을 자랑하는 그는 사춘기에도 여드름 하나 안나던 희고 건강한 피부의 소유자이다.

 90년대에 두발이 배드민턴 그물 밖으로 삐져나오면 안되었던 악명높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 흔한 땜빵 자국하나 없이 신이 빚은 조각같이 작은 두상에 모두가 감탄했다는 전설이 있다.

 아침에 면도를 해서 푸르스름한 수염자국은 저녁이 되어가면서 거뭇해지는데 나는 그 마쵸적인 변화가 매력적이었다.

명석한 두뇌와 준수한 외모를 이야기했으니 이제 성격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성질변화가 양은냄비급인 우리 아빠의 폭정(?)에 시달린 나는 어릴 적부터 배우자만큼은 무엇보다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이길 꿈꿔왔었고 소원은 이루어졌다. 남편은 육두문자하나 구사하지 않는 어진 성품에 감정컨트롤이 아주 세련된 사람이다. 거기다 정의롭기까지해서 사회생활을 할 때는 강강약약을 시전하여 아랫사람들로부터는 존경을 받고 몹시 예의가 발라 윗사람들로부터는 신뢰를 얻는다. 또한 앉으나 서나 처자식 생각에 여념이 없는 그는 모범적인 가장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시기와 질투에 심사가 뒤틀려 뒤로 가기를 누르시려는 분들은 몇 문장만 더 읽어주시길 바란다. 두뇌와 인성,외모까지 준수한 이런 사기케에도 약점이 있으니 첫째는 패션테러리스트라는 점과 둘째는 사기그릇처럼 예민한 체질의 종가집 종손이라는 것이다.


 패션감각이 제로라는 것은 사실 나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성이 센스있게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은 커다란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차라리 촌스러운 남자가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 남편은 아주 깔끔한 사람이다. 매일 샤워를 하고 손발톱은 항상 바짝 깎여있다. 나는 그거면 족하다.


 문제는 남편이 병약한 미소녀 컨셉을 탑재한 종가집 귀한 외동아들이란 것이다.

 깡마르고 비실비실했다면 나는 애초에 그를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20대 초반에 그를 처음 봤을때 나는 곰돌이 푸우를 연상했다. 전반적으로 조금 살집이 있는 체형에 아직도 얼굴에 젖살이 빠지지 않았던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아기 같았다.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내가 갈비를 흡입하는 모습을 보고 천생연분임을 직감했다고 할 만큼 우리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음식남녀이다.




 결혼전 그가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지방간'판정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결혼하자마자 얼마 안되어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독성간염에 시달렸고 온몸에 황달이 온 채 요단강 어귀까지 갔다가 왔다. 그때는 뱃 속에 큰 아이가 있을 때였다. 노랗게 변색된 남편의 눈 흰자위가 다시 하얗게 변하기까지 일 년이 걸렸다.


 장가든 지 얼마되지않아 몸져 누운 남편과 임신하여 입덧도 없이 나날이 건장해지는 나를 보며 시댁 어르신들중에는 궁합이 안맞는거 아니냐, 장가 잘못 간거 아니냐, 새애기가 남편 잡아먹을 상 아니냐 등등 흉흉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셨던 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다. 워낙에 성품이 인자하시고 명색이 교회 권사님이셨던 우리 어머님은 그런 이야기들을 애써 무시하려 하셨겠지만 그 속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여하튼 우리 어머님의 귀한 아들에 대한 트라우마성 걱정과 며느리에 대한 불신은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면 어머님은 왜? 부터 따지셨다.

배게가 불편한 거 아니냐

음식이 부실한 거 아니냐

주말에 못 쉬어서 그런거 아니냐

외출할 때 옷을 따뜻하게 안 입힌 거 아니냐.

어머님에게 가족의 모든 질병은 집안의 아내이자 엄마인 내가 정신차리고 야무지게 했다면 모두 방지할 수 있었던 인재(人災)였다.  

 

 시어머님은 신사임당도 울고 갈 정도로 현모양처의 전형이신 분이다. 모름지기 남편과 자식은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신념이 있으신 분인데 그러한 믿음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그게 동의가 안되었다. 아마도 내가 그만한 그릇이 못 되었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머슴 체질인 남동생과 무던하기 짝이 없는 우리 친정엄마라는 반대급부적 비교표본이 있었기에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7년의 시집살이를 마치고 처음으로 분가를 했을 때 나는 우리집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시어머니께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노이로제에 시달릴 정도로 어머님은 우리의 식생활과 나의 조리법 등에 관해 간섭을 많이 하셨다. 사흘이 멀다하고 우리 집에 전화해서는 손주에게 저녁 반찬은 뭘 먹었냐고 물어보신 후 나에게는 성장기 아이들을 그렇게 부실하게 먹이면 안된다고 훈수를 두기 일쑤였다. 당시 우리 큰 아이는 향년 6세. 방금 먹은 반찬의 종류도 두 가지 이상 나열하지 못하는 모지리였다. 나는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어머님의 눈에는 항상 부족하고 어설퍼 보였을 것이리라.


 그 시기의 나는 결혼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낄 만큼 어머님의 관리,감독이 힘들었고 그 원망은 고스란히 남편한테 돌아갔다. 성격상 바가지는 긁지 못하고 결혼생활에 대한 우울과 분노를 자주 표출했던 것 같다. 그 부분이 아마 남편으로 하여금 이민을 추진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의 나는 나름 속을 터놓는 지인에게 걱정이 많은 완벽주의 시어머니의 병약한 외동아들과 결혼한 것이 내 인생의 십자가라는 고백을 하곤 했다. 굼뜨고 게으르고 살림에도 취미가 없는 내가 하필이면 하이스탠다드가 요구되는 집에 시집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밖에 안하고 살면서 기름진 음식과 패스트푸드와 야식을 즐기고,

조금 시원챦게 먹었다 싶으면 자동적으로 치킨집에 전화를 걸고 TV볼 때 감자칩은 필수요,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가는 그는 먹고 싶은 것 실컷 먹다가 때 되면 갈거라는 철없는 소리를 자주 하곤 한다.  

한마디로 미련할 정도로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지 않는 것이 남편으로서의 치명적 단점이요, 나의 최대 불만이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잦은 회식,접대에 술담배와 스트레스 공격에도 건재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뭐 대수냐고 말이다. 문제는 태생적으로 우리 남편의 체질이 그렇게 썩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가족력도 안좋은 편이고 곰돌이 푸우처럼 둥글둥글 건장해보이는 피지컬에 비해 체내 근육량이 거의 0 에 수렴해가는데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자극에 예민한 병약한 미소녀, 그 자체이다.


 신혼 때 독성간염으로 시작해 그동안 앓아온 질병만 해도 담석증(기름진 음식이 원인이라 함), 대상포진 (스트레스),그리고 2년전 한국에 갔을 때 받은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발견된 갑상선암. 정확한 발병원인은 밝혀진 바 없으나 방사능 피폭이 가장 유력한 이유로 알려져 있는 이 진단명에 남편은 짚히는게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당시 화학실험실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던 남편은 독성화학물질을 다룰 때 귀챦아서 보호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했다. 갑상선 암세포의 잠복기간이 보통 5~10년 정도라 하니 시간적으로 대충 아귀가 맞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내의 책임론'을 방지하려는 남편이 억지로 짜낸 기억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했다. 결국 일년여전에 남편은 갑상선 전절제술을 받고 그 후로 매일 같이 호르몬 약을 먹는다.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의 마음이 오죽 안쓰러우랴 싶다.




 그래서 최근에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 제일 염려가 되었던 것은 모르는 이로부터의 악플도 아니요, 바로 어머님이었다. 이민와서야 해방된 CCTV 노이로제를 다시금 내 손으로 시작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었으나 이 나이먹고 시어머님 눈치보느라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절대 용납되지 않았기에 일단 저질러보기로 했다.


 처음에 어머님은 내 영상을 즐거워하시는 듯 했다. 비록 모가지까지밖에 안 나오지만 영상속에서 그리운 아들과 금쪽같은 손주들을 무척 반가워하셨다. 그러나 영상의 회차를 거듭할 수록 슬슬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어째 허구헌날 고기만 먹니? 야채 먹는것도 보고싶다 "


남편을 통해 전해들은 시청소감이었다.


얼마전 남편은 수술 후 정기검진에서 한동안 없었던 지방간과 공복 중 혈당 수치 상승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결과는 어머님께도 보고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어머님과 통화할 때면 죄지은 사람마냥 슬슬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는 법.

어제 남편이 미안한 듯이 이야기한다.


"어머님이 전화 좀 달래"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안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화를 드렸고 아니나다를까 어머님은 최근 남편의 검진 결과를 들먹이며 내 브이로그의 1편 부터 최근 영상까지 거슬렸던 부분들을 요약,정리하여 브리핑하기 시작하셨다.


 팬케이크에 메이플 시럽을 그렇게 뿌리면 안된다 (1년에 한 두번 그렇게 먹는건데요)

 삼겹살 말고 돼지 앞다리살을 먹어라 (캐나다에는 앞다리살 같은 거 안 팔아요)

 너희 빈 병 팔 때 보니깐 음료수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 ( 반년동안 모은건데요)

 매실청,오미자청 같은 거 먹으면 큰일난다. (한숟갈도 안되나요)

 소고기는 몸에 해롭다. (이로운 점도 있답니다)

............................


물론 괄호안의 이야기는 소리내어 하진 않았다.


 요즘말로 현타가 왔다.

나름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우리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했던 영상이 되려 더 걱정만 끼쳐드리고 있었구나. 내 식생활이 주제를 모르고 망가져 있었구나.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람인데...


얼토당토도 하지 않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맛있게 먹으면 0 칼로리라는 말을 어느 정도 믿는 편이다.

예컨대 햄버거 한 개를 먹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패스트푸드가 몸에 미치는 해악을 걱정하면서 먹을 것이고

어떤 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을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생각에 따라 실제로 신체에 끼치는 영향이 다를 것이라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믿는 것이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되도록 기쁜 마음으로 최대한 맛있게 먹되 운동을 하거나 다른 쪽으로 절제를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편이 스트레스 받으면서 건강식에 치중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결혼생활 19년 동안 나는 -다른데서 뒷담화를 할 망정- 단 한번도 남편에게 그의 부모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이는 천륜에 어깃장을 높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소신과 이토록 훌륭하게 아들을 키워주신 어머님에 대한 존경과 남편 역시 우리 친정 부모님은 건들지 말라는 묵시적 선포이기도 하다.


 이는 내게 여러모로 불만이 많은 남편조차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번에도 역시 남편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눈치가 빤한 남편은 어머님과 통화 이후 어쩐지 내가 풀이 죽은 것을 알고는 주말이면 폭주하던 식탐을 한껏 자제하는 듯 했다.

뭐..이런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어쨌거나 다음 생에 나의 남편상은 외모가 준수하지 않아도 두뇌가 아주 명석하지 않아도 고들빼기 한 가지에 밥 한 그릇 뚝딱하는 머슴체질의 머슬맨을 꿈꾸어본다. 물론 성격은 포기할 수 없다.

 종가집은 무지개 반사고 무남독녀 외동아들은 정중히 사절한다.


P.S : 가족과 친지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브런치에서 남편도 모르게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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