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 신이 되고 싶은 맞벌이 주부의 딜레마.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끈 <신과 함께>라는 웹툰이 있다.
영화 1,2 모두 웹툰의 재미와 캐릭터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데다가 원작에 등장한 가택신에 대한 서사가 별로 다뤄지지 않아 원작 웹툰의 팬으로서 아쉬움이 많다.
주부로서 내 관심을 끌었지만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 중에 '부엌과 불씨를 지키는 여신'
인 조왕신이 있다.
부뚜막을 깨끗이 하고 먹을 것을 귀히 여기면
온갖 병과 액으로부터 부엌을 지켜 줄 것이다.
하지만 부뚜막을 더럽히고 먹을 것을 함부로 다루면
잡귀에게 길을 내주고 화를 불러들일 것이니 명심하렷다
우리 나라의 민속 가택 신앙 중 한 가정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조왕신은 부엌에 머무르며
'부뚜막신'으로도 불리운다.
조왕신은 부뚜막 뒤쪽에 머물러 집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실을 낱낱이 적어서 하늘로 올려보내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여인들은 이 조왕신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하여 부인들은 날마다
금기(禁忌)를 정해놓고 지켜야 했다. 아녀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불을 때면서 악담을 하지 말라.
부뚜막에 걸터앉지 말며, 함부로 발을 디디지 말고 무엇보다 부엌을 항상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
[출처] 나무위키
바야흐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고 인류를 화성으로 이주시킬 생각까지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처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첨단과학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택신의 역할이 고스란히 우리 부부에게 맡겨져 있음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뚜렷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 신과 함께에서 가장 굿 캐스팅이라 평가받는 마동석님이 분한 '성주신'은 가택의 보호와 수호를 담당하며 모든 가택신을 통솔하는 대장 개념의 큰 신이다. 즉 집안의 대주이며 대들보인 가장이 성주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아마도 마동석님이 등장했을 때 느껴졌던 안도감과 듬직함에 공감하시리라 생각한다.
나는 우리집의 대주인 남편이 정말로 성주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십대 중반이라는 비교적 어린나이에 남편과 아버지가 된 이후로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가족이 우선이 아닌 적이 없었을만큼 충실한 가장이다.
이민자로서 험난한 여정을 걷는 동안에 한국에 몸 담았던 전 직장에서 몇 번이고 삼고초려를 했으나 그는 고사했다. 만약 자기 자신을 일순위로 생각했다면 분명 받아들였을 제안이다.
최근에 한국의 전직장에서 또 한 번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제는 애들도 어지간히 다 키웠으니 이제 한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좀 해도 되지 않겠냐는 식의 제법 설득력있는 제안이었고 번듯한 직장과 소속을 그리워하던 남편은 이번에는 좀 심각하게 흔들리는 눈치였다.
또한 이번 제안은 시기로보나 남편의 나이로보나 마지막일 것이 확실했다.
나는 90프로는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처자식이 아니라 당신을 우선으로 생각해 달라고.
그동안 당신은 충분히 가족을 위해 희생했고 이제는 좀 이기적인 선택을 해도 된다고 말이다.
나머지 10프로는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란 고단해도 식구들과 함께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이기적인 바램이었다.
몇날 몇일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본인을 위해서' 캐나다에 계속 남아 식구들과 함께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때마침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낯 간지러운 이야기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 쉽지 않은 일터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나는 영화속 마동석님이 연출한 든든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웬지 안쓰러운 '성주신'을 본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도 '조왕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집 가택신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뚜막에 불을 지피는 것.
부엌을 항상 깨끗히 관리하는 것.
음식을 소중히 다루는 것.
부엌에서 조리를 하면서 나쁜 언행으로 부정타지 않게 하는 것.
등이 부뚜막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덕목인데 핑계같이 들리기는 하지만 직장인으로서 나는 그것이 너무나 힘들다.
아침에 늦잠자기 일쑤에
부엌은 항상 어수선하고
식재료를 알뜰하게 관리하지 않아 버리는 음식이 많으며
부엌일을 할 때는 짜증이 나서 성질을 부리기 일쑤이다.
조왕신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나는 그동안은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이민자 가정의 맞벌이 주부로서 이러한 '만행'들이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자위해 왔더랬다.
그렇지만 '성취'라는 두 글자에 죽고 사는 나라는 인간이 한 번쯤 깨부셔 볼 만한 퀘스트라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액션플랜을 세워본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뚜막에 불을 지피는 것.-> 아침 6시에 일어나 식구들을 위해 간단한 아침식사와 도시락을 준비할 것
부엌을 항상 깨끗히 관리하는 것.-> 식사 후에는 바로바로 그릇을 적어도 식기세척기에 넣을 것.
음식을 소중히 다루는 것.-> 최대한 간소하게 먹어서 낭비하는 식재료가 없도록 할 것.
부엌에서 조리를 하면서 나쁜 언행으로 부정타지 않게 하는 것. -> 음식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 만큼은 되도록 표정을 밝게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려고 노력할 것.
이것은 의지력이 약한 내게는 마치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여 서울대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단순히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라 그 가정의 화복을 주관하는 조왕신이라고 생각하면 초인간적인 기운이 나지 않을까? 하고 조부모님 때부터 교회 장로님을 역임하셨으며 이 몸은 유아세례까지 받은 모태 나이롱 기독교 신자로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흐트러진 생활력을 다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