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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Apr 22. 2021

[일상단편] 코로나 시대의 사랑

Love In The Time Of Cholera COVID-19.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페르미나 다사가 길고 지난했던 사랑이 지나간 후 가차 없이 자신을 버린 

51년 9개월하고도 4일 전부터 지금까지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_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남자

'우웩-  51년 넘게 한 여자를 사랑했다고?'

출근길 지하철 안,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런 사랑, 내가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무섭다. 

사랑이야, 집착이야...? 무서워, 몰라, 뭐야 그거...

내릴 역을 확인 하느라, 잠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다가 11시 방향 운동화가 한켤레 눈에 들어온다.


나이키 에어맥스 90을 신다니, 오,  내 취향이다. 

아니 이런 세상에! 

에어팟을 끼고 있다. 아이폰 유저로구만. 


저기, 나, 아까 책 읽을 때, 너무 거북목이지 않았을까? 

거의 이마가 무릎에 닿을 만큼 구부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흠흠, 이제라도 가슴을 펴고, 배에 힘을 주고 바른 자세를 유지해본다. 

시선은 약간 도도하게, 30대 커리어우먼 느낌 몬지알지?


그리고는 삼성역 도착. 

안녕, 전 여기서 내려요.

아쉽지만, 잘가요. 


2. 하얀셔츠를 입은 남자

같은 날 점심시간, 회사 동료의 생일 선물을 사러 사무실 근처 백화점을 들렀다. 

함께 간 다른 동료와 지하 푸드코트에서 간단히 배를 채운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반대편 하행 에스컬레이터에 또 훈남 등장!


'헐, 대박, 완전 잘 생겼어'

동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 잔뜩 웃는 눈으로 

예의 아침의 30대 커리어우먼 모드로 다시 한번 정색. 


"언니, 마스크로 얼굴 다 가렸는데 잘 생겼는지가 보여?"

"아니 셔츠입은게 단정하잖아. 하얀 셔츠에 소매 걷은거 너무 멋있지 않아?"


에스컬레이터 양방향이 스쳐지나가는 1초쯤 되려나 싶은 짧은 찰나,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그렇게 흩어진다. 


안녕, 난 올라가요, 잘가.  

행복한 쇼핑 되요.  



3. 컴퓨터 박사

미팅 후에, 자리에 앉아 랩탑을 열었는데. 

헐... 이동 하다가 어디 부딪힌건지, 랩탑 액정이 완전히, 정말 완전히 깨져있다. 

작업 중이던 엑셀이 모두 날아갔는지, 저장은 됐는지, 오늘 하루 종일 머리싸매고 한 일들은 어떻게 되는건지.

멘붕인 상태로 IT 부서에 컴퓨터를 들고가서 이거이거 어떡하냐 발만 동동 구르는데,


담당자가 너무나 담담하고 친절하게, 

"아, 걱정마. 일단 자료 백업 해줄테니까 이 컴퓨터 임시로 쓰고, 새로운 PC 준비되면 알려줄게"하는 것이다. 


그 순간 안심이 되면서, 매일 보던 얼굴인데, 어쩐지 오늘따라 더 잘 생겨 보인다.

어랏, 그러고보니 머리가르마가 바뀌었네! 

훨씬 훠얼씬 더 잘 어울린다. 


자리로 돌아와서, 

그 애 진짜 대단하다, 컴퓨터 박사다, 칭찬하며 배시시 웃었더니   

주변에서 왁자지껄 "또 이상형 발견"이냐며 한마디씩 거든다. 


4. 나는 관대하다.

나는 굉장히 관대한 편이라 웬만해서는 사람들의 예쁜 점, 좋은 점을 굉장히 잘 발견하는데 (이것은 장점!)

그 포인트에 급속도로 빠져들었다가 또 빠르게 빠져 나온다. (이것은 단점!)

그러니 혼자서도 하루에 몇 번이고 운명적 만남과 이별을 몇 번씩 반복하는 거겠지.     


그러한 찰나의 발견이 연애감정으로 이어지거나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성의 외모만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결이 좀 다른, 

그 짧은 순간에 의미(혹은 재미)를 부여하는, 나만의 놀이 같은 것일뿐! 하고 자기 변명을 해본다. 

이왕이면 멋있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게 좋잖아!

게다가 모든 사람과 모든 순간에는 반할 만한 포인트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아?


컴퓨터를 잘 다루거나, 달리기를 잘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기만 해도, 

모두 나에게는 찰나의 운명, 운명적 사랑이 되어준다.  

더욱이 얼굴의 반 이상을 마스크로 가린 채 살아가는 이 코로나 시대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사랑의 시대. 


이제와 생각해보니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나는 어떤 면에서는 같은 지도 모르겠다. 

그가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보낸 51년 9개월 하고도 4일간의 환상이 

나에게는 찰나의 마스크 속에 꾹꾹 눌러담겨 있는지도...  


피할 수 없었다, 쓴 아몬드 향기는 언제나 그에게 보답 없는 사랑의 운명을 상기시켰다.

_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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