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 Elephant Nature Park>
여름 하면 태국, 태국 하면 코끼리
나는 사실 한 번도 태국에 가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가보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덥고 습한 날씨의 뻔한 여행지라고 여겼다. 게다가 그동안 보고 들어온 'elephant riding, 코끼리 타기 체험'은 매력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코끼리들은 너무 지쳐 보였고 마훗(코끼리를 모는 사람)은 무표정했다. 게다가 코끼리 쇼나, 트레킹에 동원되는 코끼리들의 야생성을 죽이기 위한 잔혹한 행위에 대해 알게 된 뒤로 태국은 더더욱 먼 나라가 됐다.
하지만 들뜬 얼굴로 '여행자의 성지 카오산로드'며 '싸고 시원한 맥주의 맛'을 추억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한 번 정도는 가봐도 괜찮겠지 싶었다. 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코끼리 봉사활동을 검색했고 곧바로 치앙마이의 Elephant Nature Park를 찾아냈다. 90년대 설립된 공원으로 코끼리를 타거나 그 어떤 강압적인 행위도 없으며, 다만 그들의 본성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취지라고 했다.
방문자들은 예약을 통해 코끼리를 먹이고, 목욕시키고 함께 산책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는데 항목에 따라 2500BHT(8만원)에서 6000BHT(19만원)의 비용이 든다. 왕복 교통과 점심 등이 포함되지만, 태국 물가를 감안할 때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비용을 지불한 방문자에게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다못해 사람과 걷는 방법을 훈련시키고 예쁨 받도록 조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결국 강도의 차이일 뿐 코끼리보다 인간이 우선인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걱정과 함께 여행은 시작됐다.
Elephant Nature Park
11:00am
정글 어디선가 코끼리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조의 오사무상과 나는 동시에 돌아보며 "Jurassic Park!!"라고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정글 속이었다.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풀숲 사이의 좁은 길은 어제 내린 비로 온통 진창인데, 심지어 코끼리의 커다란 발자국이 만들어낸 웅덩이까지 더해져 더욱 엉망이 됐다. 심지어 앞서 걷던 코끼리 맷때우의 똥들도 길 위에 마구 뒹굴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코끼리 땡모가 그 큰 귀를 펄럭이며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얼른 비켜주려다 미끄려져 진흙탕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땡모는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멈춰 서서 나뭇잎을 먹었다. 온통 모기에 물리고 진흙투성이지만 어떠랴. 영화 <주라기 공원>에서 트리케라톱스의 똥을 발견한 새라 박사가 된 마냥 나는 이 태초의 원시림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1:00pm
정글 산책을 마치고 코끼리들의 밥을 준비하는 시간. 하루 두 번, 계산된 양에 따라 수박과 단호박을 준비한다.
우리나라에서 복수박이라고 부르는 작은 수박이 커다란 바구니로 2개 가득이다. 수박을 아주 깨끗이, 무려 3단계에 걸쳐 씻고, 너무 무르거나 상한 부분은 도려내 먹기 좋게 등분해줘야 한다. 코끼리는 대식가라 아무 음식이나 마구 먹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생명체였다. 발달한 후각을 통해 취향이 아닌 수박은 과감히 바닥에 내팽개치고, 혹여 수박에 흙이라도 묻어있으면 요령 좋게 털어내고 먹었다. 과연 코가 손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허리 필 새도 없이 코끼리 3마리의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땀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 이거 돈 받고 해야 하는 일 같은데..."하며 농담도 오갔다. 오랜만에 해보는 건전한 육체노동에 누구랄 것 없이 유쾌해졌다. 이래서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쓰라는 거구나.
오전 시간을 함께 보낸 뒤, 우리는 코끼리와 좀 더 가까워졌다. 어떤 보호구 없이, 나는 내 손으로 수박을 직접 땡모의 입에 가져다주었고, 땡모는 곧잘 받아먹었다. 땡모는 더 달라는 듯 코를 내 무릎과 어깨에 올리기도 했다. 코끼리의 코는 예상대로 무겁고, 축축했고, 주름 사이의 털은 까끌거렸다. 땡모는 귀를 펄럭이고, 앞다리를 흔들거렸는데, 우리 조를 인솔한 마훗*은 땡모가 지금 아주 편안해하는 거라고 했다.
*ENP에서는 기존의 마훗이라는 용어를 좀 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한다고 했다. 코끼리를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행하는 존재에 가깝다.
2:00pm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강으로 갔다. 더위를 식힐 물놀이 겸 목욕을 위해서였다. 우선 코끼리 3마리가 강으로 먼저 들어간다. 코만 빼꼼 내놓은 채 잠수를 하고 신나게 노는가 싶더니 금세 뭍으로 나와 흙을 끼얹기 시작한다. 흙은 코끼리에게 가장 좋은 자외선 차단제라고한다. 내심 코끼리와 물놀이를 기대했었는데, 이미 물 밖으로 나가버린 코끼리들을 다시 불러들이기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맷때우만은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어, 우리는 작은 바구니와 목욕솔을 가지고 맷때우를 씻기기 시작했다. 어제의 비로 물살이 세져, 금세 균형을 잃고 휘청였으므로, 목욕을 시켰다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강 건너에 또 다른 코끼리 캠프 무리가 보였다. 7마리의 코끼리는 각각 등에 2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있었는데 코끼리가 강바닥에 앉을 때마다 관광객들을 물에 빠지고 환호를 했다. 코끼리들과 '물놀이'를 즐기는 관광객은 어림잡아 15명쯤은 돼보였으므로 코끼리 한 마리당 관광객 2명을 담당한 셈이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마훗이 말했다. 사람과 코끼리의 비율이 3:3, 완벽한 비율이었다. 맷때우와 맷프라차우는 사이좋은 암컷 코끼리들이다. 이 둘보다 덩치가 좀 작은 땡모는 먹성이 아주 좋다. 세 마리 모두 관광객을 태우는 일을 하다가 구조됐다. 관광객을 태우는 일을 할 때 작은 낫(hook)으로 통제를 당했기 때문에, 세 마리 모두 귀 뒤에 상처가 많이 남아있었다. 마훗은 이런 일을 하는 코끼리들은 어릴 때 영혼이 부서진다고 말했다.
부서진 영혼의 코끼리
마훗은 드문드문 강 건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모성이 강한 코끼리의 특성상, 어미 코끼리를 먼저 죽이고 새끼 코끼리를 잡는다. 눈 앞에서 어미가 죽는 것을 본 새끼는 슬퍼할 새도 없이, 네 다리와 온몸이 굵은 쇠사슬에 묶인다.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이, 나무 기둥에 매달려 옴짝 달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된다. 그러다 때가 되면 물과 먹이를 든 인간이 나타나 새끼 코끼리를 걷게 하고, 앉게 한다. 자유롭게 정글을 거닐던 아름다운 존재가 인간의 통제에 따라 보폭을 줄이고, 외발로 서고, 제자리를 돈다. 그렇게 코끼리의 영혼은 부서진다.
부서진 코끼리들은 이제 서커스로, 벌목장으로,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팔린다. 지뢰를 밟고 발목이 잘려나가거나, 도시의 강한 불빛에 눈이 멀어버린 코끼리들 혹은 너무 늙어 돈벌이가 되지 않는 코끼리들은 구조되어 이 공원에 오게 된다.
우리는 땡모 3 총사와 헤어진 뒤, 공원을 전체적으로 둘러봤다. 다리 한쪽이 짧둥한 코끼리와, 눈이 먼 코끼리들이 서로 의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눈이 먼 코끼리를 지날 때 마훗은 '밟히고 싶지 않다면 조심해, 그녀는 눈이 안보이니까'라고 농담을 했는데, 어째서인지 웃음은 나지 않았다.
구조해 온 코끼리가 공원에서 낳은 새끼 코끼리들도 종종 있었는데, 그들은 마훗도 어찌하지 못하는 말썽쟁이라고 했다. '쟤는 못됐어, 조심해 얼마 전에 마훗하나가 뒷발에 차였으니까'라며 자랑스레 그들의 영혼은 부서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한쪽은 코끼리 타기 체험을 권유하고, 반대편에서는 그런 코끼리를 구조한다. 저들로부터 바로 코끼리를 구해오거나, 금지할 수는 없는지 물었다. 어쨌든 그런 관광상품이 생계수단인 사람들이 있고, 코끼리를 소유한 사람으로부터 구해오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같은 관광객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지구 상에 남겨진 아시아 코끼리가 겨우 30,000마리뿐이라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 달라고 했다. 코끼리에게 행해지는 잔혹함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상업행위를 무시해 달라고, 또 그것을 집으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도시를 여행하는 어떤 방법
태국의 코끼리체험이 누군가의 여행 리스트에 담겨있다면, 나는 기꺼이 elephant care program을 추천할 것이다.
태국을 비롯해 몇몇 나라에서는 코끼리를 신성시 여겨왔다. 그 거대한 생명체의 갈색 눈은 통찰력이 있는 듯했고, 그 앞에서 나는 나의 가장 선한 때로 돌아갔다. 코끼리의 등 위에서는 절대 마주하지 못할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Elephant Nature Park
http://www.elephantnaturepar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