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아 본 삶
6월 달력이 중간쯤 잘려나간 늦은 봄날의 출근길, 예보에도 없던 비가 거칠게도 내린다. 어제 정성스레 세차를 마친 나의 수고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다행인 것은 요 며칠간 지극한 관심으로 눈길을 주었던 국도 2호선, 벌교를 조금 남긴 길가 가지런히 놓인 배롱나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이다.
봄날 초록을 유지하던 끝가지에 마치 수줍은 새색시의 곤지가 얹어졌는지 이제 막 시작된 꽃대가 세찬 빗속에서도 작은 흔들림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던가?
백일 동안의 살가운 데이트, 그 풍성한 꽃망울을 기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유월 들어 비가 잦았다. 어찌 보면 여름의 시작을 알리려는 하늘의 하염없는 뜻일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일정이 틀어지고 예정에도 없던 일들이 자주 생기지 않았던가. 어디 비뿐이던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예기치 않은 일들로 인해 삶의 여정이 바뀌어 하늘을 탓하고 원망했던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음도 사실인 것이다.
기대를 어긋난 현실, 그를 탓하는 내 지난날을 생각하니 왠지 초라한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봄날의 그림이 어렴풋이 그려지는 것도 그런 이치에서 비롯됨인 것 같다.
이른 봄날 어느 시골의 한적한 골목길, 조만간 무너질 것 같은 담장을 대신해 굳게도 자란 감나무, 그 아래를 지나는 내 시야에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지에 달려있어야 할 감꽃들이 마치 가을 낙엽의 모양으로 무수히 내려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에는 열매 맺지 못함에 애석하게 느껴졌지만 그 감꽃이 떨어져야 비로소 몇몇 남은 감꽃들이 실하게 열매로 달린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고 나니 그네들의 의연함에 고개 숙여졌다.
그야말로 하늘의 이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욕심 없는 떨굼이었다.
아니! 그보단 하늘에 대한 마땅한 순종이었음을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그 당연한 떨굼이 어디 감꽃뿐이겠는가?
태초에 세상은 그야말로 비워 채우고 또 채워 비우는 것들로 만들어졌고 그에 더한 순종함으로 인해 지어졌을 것이다.
한참이 지난 지금 세상은 과연 어찌 되었는가? 욕망으로 더럽혀진 바람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사랑과 온유로 옷 입혀져야 할 순종은 가을날 헐벗은 허수아비로 들판에 내팽개쳐져 있음에 누구 하나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을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 곧 그 아들에게 순종하라.’ (시편 2;1-12)
그야말로 믿음으로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네 가슴속 영원히 담아 새겨야 할 소중한 사명인 것이다. 곧 주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망가진 세상 속 우리의 하나뿐인 피난처를 지키는 유일한 방도라는 사실에 고개 숙여진다.
물론 순종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숙제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어찌하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첫 단추라도 꿰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를 한다.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의 원함을 들어 달라 하염없이 기도를 한다. 이어 그 소망함이 혹여 잘못되었을 때에는 원망으로 이어진다.
“저는 주님을 그리도 사랑하는데 주님은 결코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하는 어리석은 질문에 나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만다.
하나님께 향한 순종의 시작은 그런 우매한 질문에서 벗어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나님의 모두를 향한 사랑은 우리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뉘우치는 것, 그것이 곧 순종의 시작점이라는 변치 않는 진리임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거목아래 뿌려진 풀씨보다도 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고백 그것이 그동안 나의 보잘것없는 순종이었음을 고백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주님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나무였다고, 사랑하여 순종한다고. 그간 내 마음속 더럽혀진 모든 것들을 그날 감꽃이 그리하였듯이 다 내리겠노라고.
비록 작은 풀씨라면 어떠한가? 그 풀씨가 꽃이 되어 피고 지고 미약하나마 그 위대한 나무아래 편히 자리할 수 있음에.
비가 그쳐가고 있다.
다시 한번 두 손 모아 소망한다.
오늘 내리는 비가 부디 그 풀꽃을 피우는
순종에서 비롯된 속죄의 눈물이기만을,
내 기도를 담은 주님의 떨리는 축복이기를.
(2021,06,17 시편 2:1-12)
빗줄기가 악보로 내린다.
가사는 고달픈 삶이 대신하고
노래는 건너편 흐드러지게 앉아 있는
빚진 자들의 몫이다.
이 비 그치자
그네들은 노래하고 갈망하고
또 갈망하고 노래한다.
단비는 찔끔 내렸을 뿐인데!
입은 말할지언정 듣지 못하고
귀는 들을지언정 말하지 못함에
한계를 넘나드는 파계된 음계들
비는 다시 대지를 적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