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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것은

눈감아 본 삶

by 최국환



나주소반(羅州小盤)에 서다.




가을 꽃비가 내린다. 11월의 늦가을, 계절을 거꾸로 뒤웅박에 담아낼지언정 적어도 내겐 그런 비였다.

햇살을 어여쁘게 물들인 길 건너 은행잎이 그랬고 마당 한편 몰래 핀 단풍이 바지런히 옷을 비우더니 세월의 흔적을 얌전히 떨구는 갈대입술이 어찌 보면 꽃보다 귀한 모습으로 이리 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쉽사리 그치지 않을 비가 이어질 것 같다. 이 비 그치면 사라질 모나지 않은 계절 가을, 아쉬운 마음 곱게 여미어 한 장 낙엽에 지난 기억을 그려보기로 했다.


겨울을 맞은 낙엽들이 세상을 향해 그저 겸손으로 내렸다면 내겐 오래전 마음에 품어 간직했던 어머님의 작은 소반小盤이 그랬다. 적어도 그 흔적은 몸이 부서지는 날까지 소중히 담아 간직해야 할 내 마음의 잔잔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나주소반 羅州小盤이라 했던가! 전라도가 고향이신 어머님께서 신접살림으로 들여온 작은 소반은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내 깊은 곳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저 눈으로 보는 형상이기보다는 마음이 먼저 알아챈 오랜 기억이었다.

한참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님의 식탁엔 언제나 너른 두레상이 차려졌고 그 곁에 얌전히 자리한 작은 소반 위엔 늘 구수한 숭늉이 식사를 마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하니 어여쁜 말씀마저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작기도 한 것이 조금의 거리낌 없이 자리를 차지했고 모양은 어머님을 닮아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간결함과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얼마 전, 무심코 찾은 작은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나주소반, 그것엔 어머님의 떠남과 함께 사라진 소중한 흔적들이 장인의 마음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모나지 않은 겸손이었다.


천판天板은 은행을 곱게 다듬어 변죽으로 운각雲閣에 이어졌고 운각을 지나니 어느 고운 여인네의 수줍음을 닮은 다리와, 그 다리를 잇는 가락지 또한 단풍으로 여민 각角 없는 절제가 내려앉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자식들 마음에 그 어떤 상처 하나 남기지 않으려 말없이 사셨던 당신의 어여쁜 미소마저 모퉁이마다 둘러쳐져 있지 않은가!

오십을 훌쩍 넘은 나이에 바둥바둥 세상을 살아 버티려 했던 수많았던 날들, 하여 많은 상처를 남들에게 남겼고 그로 인해 변해버린 내 인생의 굴곡들, 부질없이 살아간 날들이었다.

남들에게 상처를 남겨야만 살아 버틸 수 있는 세상, 그 함한 이 자리에 어머님의 작은 소반이 새삼스레 다시 그리워진다.


사람을 살리는 수단은 마음이 고운 자의 심성과, 그의 입술과,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수를 품은 심성으로 각을 세워 상대방을 바라보고, 그를 향한 추악한 입술에 수많은 상처가 새겨지고, 그런 마음으로 쓰인 많은 글들마저 다듬어 고치는 자에 의해 일으켜 세워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남겨져야 했을까.


적어도 내 기억 속에 남은 어머님의 소반은 그렇지가 않았다.

꽃처럼 화려한 미사여구로 자신의 의도를 숨겨 감추지도 않았고,

초라한 속살을 감추려 그 어떤 색으로도 덧칠되지 않았다. 그저 장인의 소박한 심성으로 다듬어진 그것은 단지 나를 향한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모난 것에는 부딪침이 많다.’ 하신 당신의 귀하디 귀한 선물이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잠시 썰물에 쓰여 다음 물에 쓸려 없어질 흔한 각오가 아닌 세상 다하는 날까지 흩어 사라지지 않을 각인으로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잠시 그쳤던 꽃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앞산 그득 쏟아져 버린다.

봄에는 초연한 녹색으로 말을 걸더니 여름을 하염없는 시련으로 키워냈고 이리 늦은 비에 몸을 내려 겨울을 맞고 있다.

세상을 덮을 하얀 눈이 마음 한편에 뿌려진다. 아무도 지나지 않았을 흔적일 것이다.

그곳 그 언저리에 내가 서있다. 이만큼 살아왔기에, 이리 험한 세상을 그리 못나게 살았기에 비록 홀 벗은 몸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그 마음 한편에 어머님의 심성을 닮은 나주소반 羅州小盤이 있었다.

지혜의 말씀이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그리움이란 것은






제법 두꺼운 가면을 쓴 나를

녀석은 멀리서도 알아차렸나 보다.


짐작이라도 한 듯

옷 벗은 처녀의 실족함으로

움직임 없이 다가오는 입김

스치기만 해도 아픈 것이

때론 깨진 종지 속,

통증으로 다가서고

때론 천상의 꽃 향으로 달아나는

예고편 없는

삼류 영화의 스토리 같은 것,


바람에 실려

붙잡을 수 없는

그네들의 비행을

사랑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리움은

저만치서 불어오는 게 아닌

이미 내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음에


오늘은 여전한데

변해가는 모든 것이

내겐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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