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이후, 건축이 잃은 것

lecture 22

by BE architects

바우하우스의 폐교는 한 학교의 종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건축이 정치와 정면으로 충돌한 최초의 순간이었고, 동시에 건축이 자신의 언어를 잃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자 건축가들은 흩어졌고, 사상은 국경을 넘었다.

바우하우스는 흔히 기능주의와 합리성의 출발점으로 설명되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본질은 아니었다. 독일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전후 사회의 불안, 계급 문제, 정치적 긴장 속에 성립했던 바우하우스는 보편적이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특정한 상황에 뿌리내린 사상이었다.

bauhaus.jpg Staatliches Bauhaus, 1925

이 시기 수많은 건축가들이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그들의 이동은 망명이었지만, 동시에 이식이었다. 사상은 축소되고, 윤리는 정제되었으며, 남은 것은 형식과 기술이었다. 미국이 그 형식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는 정치 없는 근대, 혁명 없는 아방가르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우하우스는 미국에서 다시 태어난다. 하버드와 시카고에서 교육과 시스템으로 정리되었고, 급진성은 커리큘럼이 되었으며, 비판은 방법론으로 치환되었다. 건축은 사회를 바꾸는 도구라기보다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기술로 자리 잡았다.

seagram building new york 1958.jpg Ludwig Mies van der Rohe’s Seagram Building in 1958 after construction completed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이었고, 동시에 미국 모더니즘의 가장 완성된 상징이 되었다. 그의 건축은 사회를 말하지 않았고, 이념을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완벽하게 정제된 구조와 비례, 침묵에 가까운 공간을 제시했다. 미국에서 미스의 건축은 너무나 성공했다. 근대건축은 과연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치에 가장 잘 적응한 형식이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바우하우스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형태와 원칙이지, 그들이 서 있었던 입장 그 자체는 아니다. 유리와 강철은 남았지만, 왜 그것이 필요했는지는 종종 잊힌다. 그리고 건축은 질문이 아니라 해결책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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