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맨 May 12. 2019

"엘랑 비탈"과 "미세변이"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배우는 삶과 경영의 자세

프랑스의 철학자인 베르그송(1859-1941)은 <창조적 진화>라는 저서를 1907년 출간합니다.


여기서 잠깐. 베르그송은 철학자입니다만, 어릴 적부터 외국어, 수학, 역사 등에서 발군의 학업능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학력경시대회 수학 문제의 풀이가 너무 완벽하고 아름다워 <수학연보>라는 전문학술지에 게재되었다는... 그러나 이후 스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수학을 공부하지 않고 철학과로... 베르그송에게 수학이란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되는 과목'이었다는데 그래서 그랬을까요.^ㅠ

철학자인 그가 1922년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과 시간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고 논쟁한 것은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창조적 진화>라는 철학서적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습니다.(???) 이 저서가 단어와 문장, 문단 구성, 운율 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작품이었다고... 

여느 천재와 마찬가지로 이 분도 수학, 과학, 철학, 문학에 모두 발군의 재능을 보이셨군요...


<창조적 진화>로 다시 돌아와 볼까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진화는 '(돌연)변이-적자생존-자연선택'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지요. 딱히 언급은 없었지만 '환경의 힘'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다윈(생물진화론)과 스펜서(사회진화론)의 이론입니다.


반면, 베르그송은 

진화란 의식(생명)이 물질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

이라고 합니다. 진화론에서 언급되지 않던 진화의 방향성을 제시하셨죠.


그리고 진화란 생명체 안의 진짜 생명, 즉, "Elan vital(엘랑 비탈, 역동하는 생명)"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며 그동안 진화론에서 놓치고 있던 진화의 동력을 설명합니다. 

그 엘랑 비탈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엘랑 비탈은 생명의 모험정신이 본질이랍니다. 어류나 곤충이 훨씬 두꺼운 껍질을 포기하고 민첩성을 택함으로써 물질에 갇히지 않고 의식을 갖게 된 것은 도전정신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오~ 정말 기가 막힌 설명이 아닙니까?


또 다른 내용. "미세변이". 생명체에서 한 부분의 진화가 다른 부분을 너무 앞서가면 그 진화는 수용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가 쇠를 씹어 먹을 수 있도록 진화하더라도 위장이 쇠를 소화를 못 시키면...?


무거운 갑옷을 입었던 유럽의 기사들은 가벼운 갑옷과 민첩성을 택한 칭기즈칸의 군대에 처참히 패배해버렸습니다. 물질에 갇히지 않고 의식을 강조한 도전정신, "엘랑 비탈"입니다.


짧게나마 <창조적 진화>를 통해 베르그송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측면에서 우리를 돌아보게 되네요.

"진화란 의식이 물질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 왠지 부끄럽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돈, 안정적인 직장 등으로 대변되는 '물질'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진화가 이 반대 과정이라니...


그러고 보니 부나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재벌 후세, 전문직 종사자들이 일탈을 저지르고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접합니다. 최근에 많이 이슈가 되었던 항공사 재벌 가족을 보니 분노를 넘어 한편으론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삶의 방향-"엘랑 비탈"-을 잃어버렸길래 저렇게 살아갈까... 행복한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거든요... 물론 부와 안정성은 개인으로서 행복의 충분조건임은 분명합니다만, "엘랑 비탈"이 없어 물질에 안주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성을 잃어버리면, 의식을 잃고, 멈추고 퇴보하고, 불행해짐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엘랑 비탈"은 무엇인가요?


기업은 어떤가요.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여 '두꺼운 껍질'을 만드는 순간 그 기업은 쇠퇴해 갑니다. 남들보다 20년 앞서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던 KODAK사는 자신들의 필름사업이 망가질까 봐 신사업을 망설였고 결국 지금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신들의 사명-"엘랑 비탈"을 '인류의 기록을 지원하는 것'에 두었더라면 새로운 디지털카메라 기술이 나왔을 때 과감히 기존의 필름 사업을 저버리고 진화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들의 "엘랑 비탈"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여러분이 속한 조직의 "엘랑 비탈"은 무엇인가요?


사회적으로도, 안주하고 의식이 약해진 사회는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역사 속에서 부강했던 대제국들이 의식이 약해지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든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이 모두 처음의 개국 의식을 잃으면서 멸망했지요. 사대부 중심의 공화정으로 개혁정치를 꿈꾸었던 조선은 그 건국 초의 "엘랑 비탈"을 잃어버린 채, 계급사회가 되고 사대주의에 안주하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겼지요. 지금 우리 사회의 "엘랑 비탈"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변화와 혁신은 "미세변이"이어야 한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스쿼트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의자가 없지만 의자가 있는 것처럼 앉았다 일어나는 운동인데,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에 큰 효과가 있어 하체와 몸매 가꾸기에 매우 좋은 운동입니다. 효과적인 스쿼트를 위해서는 무게를 늘려가야 합니다. 무게를 늘이기 위해서는 허리 운동과 스트레칭을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스쿼트만을 고집하면 더 이상 무게를 늘릴 수도 없으려니와 결국 허리와 무릎에 큰 부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도 그렇습니다. 특정 부서, 특정 개인이 매우 특출 나서 조직을 이끌 수도 있지만, 그것이 조직에 체화되지 못하면 그 조직은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90년대 '세계경영'을 표방하며 세계적으로 굴지의 대기업이었던 대우그룹은 김우중 회장의 1인 재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회장의 영향력이 큰 그룹이었습니다. 회장의 역량이 그룹에 동화되지 못한 채 회장의 역량이 흔들리니 그룹 전체가 허망하게 좌초되어 버렸지요. 

또 조직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직원이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하는 등 조직을 벗어나는 경우를 봅니다. 소위 '잘난 친구'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되지요. 베르그송의 주장처럼 특정 직원의 진화가 다른 부분을 앞서가서 진화가 수용되지 못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르그송의 "미세변이"를 특정 개인이나 부분이 빠르게 진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새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조직 내 부분적 진화가 발생하면 그것이 미세변이가 될 수 있도록 조직의 다른 부분이 함께 진화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진화를 할 수 있는 조직의 문화를 가꾸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결국 조직의 "엘랑 비탈"이 중요해지네요.


개인 차원에서, 기업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의 "엘랑 비탈"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분의 진화가 전체 차원의 진화로 승화할 수 있는 역량과 문화의 내재를 생각해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이클로이드" - 내공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