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라는 '그릇'에 내용을 담아내는 설득의 지혜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
인텔사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고든 무어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5년에 주장한 이야기입니다. 1965년까지의 경험으로 주장한 바이었으나 이후의 발전 속도 역시 거의 정확히 예측하지요. 그래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무어의 법칙(Moore's Law)'으로 명명되고 일반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02년 황창규 당시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이 앞으로는 1년에 2배씩 용량이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몇 년 간 이 주장이 현실화되면서 '황의 법칙'이 알려지기도 했지요.
지난 20년간 컴퓨터의 성능은 1백만 배로 증가하였습니다.
2005년 즈음입니다. 우연찮게 방한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 회장의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연설 중에 "20년 동안 컴퓨터 성능이 1백만 배가 증가했다"라고 하시네요.
연설을 들을 당시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행사장을 나서면서 '20년 동안, 1백만 배'가 뇌리에 맴돌았습니다. '왜 1백만 배지?'
무어의 법칙을 생각하면 24개월, 2년에 2배, 황의 법칙을 생각해도 1년에 2배인데 말입니다.
네. 조금 더 생각해보니 1년에 2배라는 것이 10년에 20배, 20년에 40배가 아니었던 것이죠. 10년이면 2*2*2*2*2*2*2*2*2*2=2^10=1,024, 대략 1,000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년이면요? 20년이면 10년이 2번이니 2,000배? 아니죠. 1,000배*1,000배=1,000,000배, 즉, 1백만 배입니다.
아! 드디어 이해했습니다. "2배=1백만 배"라는 것을요...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더욱 강한 임팩트가 있어 보이시나요? 어떤 것이 더욱 이해가 되고 이후의 이야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때 깨달았지요. 빌 게이츠는 엔지니어가 아니고 타고난 마케터이자 커뮤니케이터라는 것을요...
한적한 길에서 한 운전자가 자동차를 몰고 가고 있네요.
어라..? 갑자기 운전자 옆에 누가 나타납니다. 바로 저승사자이지요... 운이 다한 운전자를 데리러 왔나 봅니다... 웃으며 "Sorry"...
그리고 운전자가 앞을 보니... 아뿔싸! 공사 중입니다! ㅠㅠ
과연 운전자의 운명은...?
브레이크를 밟으니 신기하게도 차가 정지했습니다. 원래 사망할 운명이었는데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운전자의 운명을 바꾸었네요!
이제는 운전자가 저승사자에게 한마디 합니다. "Sorry"
아까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어디 가고... 저승사자가 시무룩 해졌네요.
네. 벤츠사의 2010년 자동차 CF입니다. "우리 회사 자동차의 브레이킹 파워가 몇백 kgf"라고 말하는 것보다 "Sorry"라는 단어 두 번의 주고받음으로 저승사자도 어쩔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이 CF가 훨씬 상대의 공감을 일으키지 않은가요?
한 가지 더. 숨은 유머 포인트. 광고 속 저승사자의 모델은 벤츠사의 경쟁사인 폭스바겐사의 회장과 닮은꼴입니다. "우리 회사가 경쟁사보다 더 좋아요"라는 말보다 1백만 배 재미있고 효과적인 전달이네요.
야구 해설자가 투수의 느린 공을 지적합니다. "공 속도가 100km 밖에 되지 않는군요"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공이 어느 회사 제품 인지도 알 수 있겠네요"라고 표현하면 어떨까요? 전자는 정보의 전달입니다. 후자는 정보를 포장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공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목적은 단순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바로 인해 상대가 변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용과 함께 그를 담는 '그릇'도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어떤 '그릇'에 담겨 나오느냐에 따라 전달의 효과가 천양지차이기 때문이지요. 같은 와인이라 하더라도 종이컵에 담긴 와인과 와인잔에 담긴 와인이 같을까요? 아, 물론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과장하여 '그릇'을 넘치게 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겠지요.
빌 게이츠와 벤츠사에게서 배우는, 내용을 공감이라는 '그릇'에 넘치지 않게 담아내는 지혜입니다.
by Dol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