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예쁘다. 나는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엄마는 고아인지 아빠, 엄마가 없다. 엄마하고만 산다니 살기 힘들거라 남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대다. 난 돈에 아쉬운 적이 없다. 엄마가 회사를 다니지도 않아 내 곁에 많이 있어주고 사랑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외모 또한 엄마의 유전자와 상상 속의 아빠(그는 정말 잘생겼다)의 더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아 훌륭하다. 애들은 나를 우러러본다.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못하는 게 없지. 성격은 조금 도도하긴 하지만 겸손한 연기도 잘하니 인기가 있는 편이다.
남자애들은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지네끼리 난리다. 이런 나인데 짝사랑이라니, 자존심 상해 죽겠다. 휘는 알까? 모르겠지. 날 싫어하지만 안 해도 좋은데... 그 미친 할망구가 그따위 말을 할게 뭐람. 휘에게 여자는 독이라나. 절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여자와 만나지도 못라게 하라니. 그래서 자기 엄마하고도 만나지 못하게 했나. 아무리 아파도 어린 아들 안아줄 힘이 없었을까. 가만... 엄마도 여자에 해당되나? 진짜 엄마가 아닌 거 아냐. 사장님이, 아 또 사장님이라 하네. 이젠 아빠지. 아빠가 그 여자랑 휘랑 일부러 떨어뜨려 놓은 걸 거야. 불쌍한 휘. 우리 엄마가 다가가기만 해도 움츠려 들고, 나한텐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 내가 벌레도 아닌데 피하기만 하고. 대체 누구랑 얘길 할까. 엄마가 자기 엄마가 된 지도 2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아줌마라니! 엄마가 미워. 엄마가 사장님하고 결혼만 안 했어도 휘를 어떡해서라도 꼬실 자신이 있었는데. 다 망했어. 우린 법적으론 남매야. 쌍둥이도 아닌 동갑내기 남매. 죽고 싶을 만큼 슬퍼.
벽을 치는 강도가 높아지면 휘는 어김없이 뛰쳐나간다. 나는 이때 두근거리지. 휘의 방을 들어갈 시간이니까. 첨엔 들킬까 봐 들어가자마자 나왔는데. 지금은 느긋이 즐겨. 네 트레이닝복 냄새. 네가 누워있던 침대에 누워보기도 하고. 그러다 책상과 서랍사이 무언가 발견. 느낌이란 게 있잖아. 휘의 일기장. 보지 말았어야 했나. 휘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물론 휘가 날 배신한건 아니다.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난 휘가 날 좋아하지 않은 이유가 할망구의 말 때문인 줄 알았다. 날 좋아하지 않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 휘가 나 아닌 딴 여자를 사랑하는 건 믿고 싶지 않지만, 휘가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내게도 기회가 있어. 역시 난 긍정적이야.
그런데 휘의 사랑이 우리 반 국어선생님이라니! 취향이 고약하네. 이런 취향이라면 내가 불리해지는데. 선생이라는 작자가 학생을 꼬셔도 되는 거야. 확 어디 신고라도 할까? 휘가 다치면 안 되지. 내가 지켜줄게. 휘야. 영원히 짝사랑이어도 좋아. 네 곁에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나일 테니까. 그 여자 언제까지 네 곁에 있을 수 없지.
겨울방학식날, 그 여자가 날 불렀다. 타깃은 정확히 말하면 연수였지만, 복도에서 마냥 기다릴 순 없었겠지. 연수에게 편지 좀 전해달라 했다. 안 뜯어볼 내가 아니지. 어라, 이 여자 뭐야? 러브레터 같은 이 느낌 뭐지? 이 여자 알고 보니 양성애자에 어린 학생 가지고 장난치는 사이코? 휘는 이 여자를 사랑하는데 이 여자는 다른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재밌게 되었네. 휘에겐 좀 미안하지만 내겐 기회다. 이 편지는 일단 내 거. 이 여자가 잘 되는 꼴을 볼순 없지. 연수는 나도 호감이 가는 애인데... 할 수 없지. 선택에는 손실이 따르니까. 미안. 내가 이 여자랑 친하게 되면 휘랑 같이 밖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담아 이 여자에게 편지를 써야지. 이런 글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걸.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