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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ias Feb 22. 2024

내 마음은 무채색

마음의 방어기제(2) Black

저는 요즘 연애를 하고 있어요. 이곳은 사람들이 결혼을 일찍 해요. 제 나이에도 벌써 결혼한 친구들이 많아요. 다들 연애 경험도 많고요. 저는 처음이에요. 다행히 여자친구가 먼저 다가와 이끌어 주었어요. 저도 여자친구에게 호감을 느꼈냐고요? 아니요. 전 느낌이 없어요. 아, 여자친구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감정이 없어요. 누구에게도 별 느낌이 없어요. 사람에게 요. 그런데 어떻게 친구가 있냐고요? 바보는 아니니까요. 친구들이 웃으면 같이 웃고 대충 분위기 봐가며 따라 하면 문제 되지 않아요. 가끔씩 친구들이 네 속을 모르겠다. 마음 좀 터놔봐라 하는데 할 말이 없어요. 제 마음을 저도 모르니까요. 남자애들하고는 그래도 운동하고 농담하면서 잘 버티고 있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도 될 거 같긴 한데... 문제는 여자친구예요. 다양한 인종이 모여있다 보니 다들 외로운가 봐요. 연애도 쉽게 시작하고 결혼도 쉽게 하네요. 저만 연애 번 못바보가 되기 싫어 다가온 여자친구와 덥석 사귀게 되었어요. 벌써 1년이 넘었어요. 여자친구는 절 정말 사랑해요. 아니, 사랑한대요. 저도 사랑한다고 말해요. 여자친구는 그 말을 믿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널 믿지 못하는 자신이 밉다 하며 내게 미안하다고 해요. 사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지요. 다 연기니까요. 그런데 여자친구가 결혼을 하자고 해요. 올 것이 왔어요.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지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에요. 사랑을 성실과 노력의 양으로 본다면 사랑으로 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여자친구에게 최선을 다하기는 해요. 하지만 스킨십을 해도 무덤덤하고 보지 못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저 나쁜 놈이죠? 여자친구에게 말해야 되지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외톨이는 되기 싫어요. 외롭지는 않은데 혼자는 싫어요. 튀는 거요. 어떡하지요?


제 마음은요, 무채색이에요. 사람들은 뭐래요? 감정이 얼마나 된데요?

좋았던 기억이 뭐냐고요?

슬펐던 기억은 뭐냐고요?

기억이 없어요. 초등학교 때까진 밝았던 것 같은데... 중3 그 사건 이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 사건.

그전에는 분명 있었어요. 자전거를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 좋아하고, 밝은 아이였던 것 같은데. 즐겁기도 했을 거예요. 사진을 보면 지금과 다르게 진짜로 웃고 있으니까요.


아빠와 화해했냐고요? 네... 겉으론 사이좋아요. 예의 바르게 행동하니까요. 아빠한텐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나와요. 우리 집은 화목해요. 제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까요. 전에 내가 아빠를 미워했다고요? 지금은 용서했냐고요? 미워하지 않아요. 그런 감정이 없으니까요. 저도 이해가 안 돼요. 분명 있었던 감정들하나도 느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 마음이 무채색 같다니까요. 제 여자친구는 무지개색일 거예요. 내가 그 친구의 무지개색을 검정으로 덮어버리면 어쩌지요?

Black 은 정말 해맑은 자유로운 소년이었다. 부모님은 소년에게 그저 건강하고 밝게 자라라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소년은 망설임 없이 " 아빠요!"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소년은 자신은 마이스터에 가서 기술을 배워 얼른 취업하고, 강가에서 낚시를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 순간, 아빠의 큰 손바닥에 소년은 귀싸대기를 맞는다. 소년은 어리둥절해한다. "다시 한번 말해봐, 이 자식이. 고등학교만 나와 공장에 취직한다고? 곱게 키웠더니 배가 불렀구. 공 취직해서 네가 잘 살 것 같아? 대학도 못 나온 놈이 사람 구실이나 하겠어? 이걸 그냥, 콱!" 소년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빠, 전 대학 같은 거 관심 없어요. 자연 속에서 잔잔한, 악. 으악. 왜 이러세요!!!" 아빠는 소년을 발로 짓밟는다. 분에 못 이겨. 사내자식을 잘못 키웠다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며, 이런 자식을 아들로 둔 내가 병신이라며, 예술하는 지네 엄마를 닮아 이모양이라며... 소년을 밟아댄다.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소리에 엄마가 달려온다. 날 도와주지 않네. 지켜만 본다.


소년은 꿈인가 싶다. 내가 누구고 날 무참히 짓밟는 저 사람은 누구지? 어떤 여자가 비웃고 있네. 여긴 어디야?  누구지?  누구야...


그 사건 이후 소년은 감정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낯설다고 한다. 아빠의 말을 따라 대학을 잘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적응할 수 없었다. 외톨이에 성적은  꼴찌였다. 외국으로 도망갔다. 아빠, 엄마에게서 분리된 K는 어떡하던 살아남아야 했다. 친구들을 따라 하니까 무리에 자신을 받아주었다. 여자친구도 생겼다.


"선생님! 저도 이젠 진짜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어요.  내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을 겪을 때,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경험을 차단하는 방어기제가 '해리(dissociation)'입니다. 해리 증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다중인격자입니다. 아주 신기하게 보이지만 우리도 특정 상황에서 누구나 해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힘들면 정신이 멍해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해리된 것이고요, 분명 내가 한 일이라 하는데 정작 나는 기억이 나지 않을 때, 내 일인데 남의 일처럼 감정이 느꺄지지 않을 때, 꿈인 듯 내가 주변환경과 분리된 듯한 느낌, 내가 분리되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 모두 잠시 동안이지만 해리되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 적어도 한번 이상은 해보셨을 거예요.


K는 끔찍스러운 그 사건에 대해 기억 내 것이 아닌 경험으로, 아무런 감정이 실려있지 않은 기억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부모님을 증오할 수도 없기에 감정을 모조리 없애버립니다. 어릴 적 소년과 현실의 내가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입니다.  


K는 여자친구에게 털어놓기로 합니다. 그녀가 떠날 수도 있지만 진실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내 진실과 마주하기를.


K의 마음 어딘가에서 벌레가 움직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듭니다. 눈물 한 방울이 흐르네요.

"저 슬픈 거 같아요... 선생님?!"


이미 시작되었네요. K의 힘겹지만 의미 있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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